탈출기 말씀 피정 (5) 모세가 본 것, 모세가 실패한 것 지난 호에서는 모세가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는지(2,1-10 참조) 살펴보았습니다. 모세는 레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어머니 요케벳의 지혜로운 대처로 그 위험에서 벗어나 파라오의 딸 손에 자라게 됩니다. 파라오의 딸이 생각 없이 붙여 준 ‘모세’라는 이름이 결국 모세의 사명을 미리 알려주는 아이러니가 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모세가 처신을 잘못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어느 날 성경은 이야기 전개에 꼭 필요한 정보만 제공합니다. 2,11은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성경은 이때 모세가 대략 몇 살이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동족이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때려죽였을 정도니, 요즘 말하는 ‘중2병’에 걸린 사춘기였을까요? 아니면 자기 동족을 염려할 만큼 철이 든 나이였을까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치포라와 혼인한 점을 봐서 이미 혼인 적령기가 지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도 7,23에서 스테파노는 최고 의회에서 모세가 “마흔 살이 다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볼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합니다. 곧 모세는 4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 뒤, 역사의 현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말입니다. 40년간의 준비 성경 저자는 모세가 40년 동안 무엇을 하며 성장하였는지에 대해 일절 말해주지 않습니다. 왕궁에서 자랐으니 이집트 왕족이나 고위층 자녀를 대상으로 한 정규 교육을 받았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7,22에서도 스테파노는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배운 지혜는 무엇이었을까요? 지혜문학 연구가들은 잠언 22,17-23,14이 이집트에서 가르치던 <아멘엠오페(Amenemope)의 잠언>을 번역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잠언이란 인간 삶에 필요한 실천적 지혜를 외우기 쉽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임금은 백성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등을 알려 주는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대개 궁중 학교에서 잠언을 가르쳤다고 전하는데, 모세가 궁중 학교에서 공부했다면 이런 지혜를 배웠을 것입니다. 물론 모세는 그 기간에 이집트식 교육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자기 형제자매가 누구인지도 알면서 지낸 것이 분명합니다(4,14; 15,20 참조). 아마도 유모인 친어머니가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브리인을 없애려는 파라오 곁에,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둘의 대립은 탈출 15장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40년간 모세가 겪었을 신원에 대한 갈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왕궁에서 파라오 딸의 아들로, 왕자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했던 모세.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모세는 보았다 2,11은 모세가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고 전합니다. 사도 7,23은 이에 대해 “그의 마음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볼 생각이 떠올랐”다고 전합니다. 동포들의 처지가 궁금해서 밖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40년 동안 히브리인이라는 신원 의식을 갖고 자기 민족에 대해 궁금해하며 살았겠구나 하고 추측해 봅니다. 모세는 동족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구중궁궐 같은 파라오의 왕궁 밖으로 나옵니다. 드디어 자신을 둘러싼 장막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밖으로 빠져나온 모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성경은 두 번에 걸쳐 모세가 “보았다(와야르)”(2,11)고 전합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이 강제노동을 하는 모습과 동포 가운데 하나가 이집트인에게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보다’는 ‘알다’, ‘깨닫다’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세는 동포들의 처지를 모르고 있다가 파라오의 궁전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파라오의 궁전 안에서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동포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깐! 모세의 인생에서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모세는 40세가 되어 동포들을 도와주려다가 도리어 큰 실패를 맛봅니다. 결국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거기서 40년을 지냅니다(사도 7,30 참조). 모세는 80세가 된 뒤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탈출시킵니다. 하지만 다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뒤 120세 되는 해에 죽음을 맞습니다(신명 34,7 참조). 모세의 인생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40년을 어둠에서 살다 밖으로 나왔는데, 곧바로 실패만 경험하고 다시 40년 동안 미디안인들 사이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던 모세. 이렇게 40년을 준비한 뒤 드디어 백성 앞에 나서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빼내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되지만, 백성과 함께 광야에서 다시 40년을 지내야 했던 모세. 하느님에게 선택된 사람의 삶은 이처럼 연속된 고난을 겪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하느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세의 실패 모세는 왕궁에서 자랐기에 공명심이 컸나 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스스로 구세주가 되어 백성을 구해보겠다고 덤벼들었는지도 모릅니다. 2,12에 따르면, 모세는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 하나가 이집트인에게 맞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를 때려죽여 버립니다. 이튿날에는 자기 동포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은 모세가 두 당사자 가운데 ‘잘못한 사람’에게 왜 동족을 때리느냐 따졌다고 전합니다. 모세가 너무 순진했던 탓일까요? 그 히브리인은 모세에게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2,14) 하고 대꾸합니다. 성경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는 늘 중요합니다. 거기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종종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히브리인은 모세가 스스로 백성의 지도자와 판관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성 밖으로 나와 뭔가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지만, 스스로 지도자이며 판관인 양 행세합니다. 이 대목에서 앞선 대목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2,12에서 이집트인을 살해할 때에도 모세는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행동을 합니다. 자기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모세의 태도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세의 태도 때문이었을까요? 모세는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결국 미디안 땅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파라오가 이번에는 정말 모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삶은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 신학생 시절 현장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며칠, 몇 달 정도의 체험이었는데, 현장에서 삶의 고통을 모두 아는 듯 행동했습니다. 알량한 체험으로 사람들을 구해야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때 탈출기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그 뒤 소록도에서 1년가량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46년이나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아오신 두 수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소록도로 오신 그분들을 보면서, ‘삶은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완전히 변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40년은 광야에서 백성과 동고동락합니다. 이런 모세였기에 하느님과 백성을 중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모세를 사랑해 주셨고, 백성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모세를 존경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삶을 단순히 체험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체험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살려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뭔가를 체험으로 알고자 하는 이들이 한 번쯤 짚어 봐야 할 점입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5월호(통권 458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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