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말씀 피정 (14)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면서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의 세칙을 마련해 주십니다(13,1-16 참조). 이번 호에서는 파스카 축제와 직결된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에 관해 살펴본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광야로 이끌고 가셨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성경에서 하느님의 복은 맏아들을 통해 이어집니다. 야곱에게 하느님의 복을 팔아넘긴 에사우를 제외하고, 하느님의 복은 언제나 맏아들을 통해 전해집니다. 성경에 맏아들의 족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하느님의 복이 맏아들을 통해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복이 맏아들을 통해 이어지는 이유는 맏아들을 하느님의 소유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태를 처음 열고 나온 맏아들과 맏배를 하느님 것, 곧 거룩한 것으로 여깁니다. 곡식의 맏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 처음 난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고대 근동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맏아들과 맏배, 맏물을 신성하고 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예식을 거행했는데, 가나안 땅에서도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의 흔적이 엿보입니다(2열왕 16,3; 21,6; 예레 19,4-5; 에제 20,31 등 참조).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를 거부하고, 맏아들 대신 대속 제물을 바쳤습니다. 13,1-2과 11-16은 이러한 관습을 탈출 사건과 연결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맏배와 맏아들을 치신 것을 기념하여 태를 처음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하지만, 문설주에 발린 피 덕분에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이 살아난 것처럼 맏아들을 대신해 양을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맏아들뿐 아니라 나귀도 대속 제물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와 양은 고기로 먹을 수 있지만, 나귀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아울러 나귀는 짐을 지고 나르는 중요한 짐승이므로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속할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데에도 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맏이와 맏배가 신성하다는 사고방식을 염두에 두면, 창세 4장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왜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시면서 카인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지 않으셨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창세 4,3-4). 여기서 카인은 그냥 땅의 소출을 바쳤지만,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인이 맏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내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정말 귀한 맏배인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누룩 없는 빵 13,3-10은 누룩 없는 빵에 대한 세칙을 전합니다. 누룩은 일반적으로 ‘썩는 것’을 의미하기에 부패와 타락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마르 8,15 참조), 사두가이의 누룩(마태 16,6.11.12 참조)을 조심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13,3-10은 백성이 급하게 이집트를 탈출하는 바람에 누룩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파스카와 연결하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누룩 없는 빵을 떼어 주며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제병을 만들 때 누룩을 넣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집트 곧 과거의 누룩을 떨쳐버린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메주자 탈출기는 누룩 없는 빵을 이레 동안 먹는 것과 맏아들과 맏배를 봉헌하는 것 모두 주님께서 하신 일, 곧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계속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손에 감은 표징과 이마에 붙인 기념의 표지로 여겨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뇌라고 말합니다(13,8-10.14-16 참조). 오늘날도 유다인들은 성구함(테필린)을 팔과 머리에 묶고 그 안에 담긴 성구를 꺼내 외우면서 하느님의 가르침이 마음과 머리를 다스리도록 합니다. ‘셔마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기도 성구(메주자)는 신명 6,4-9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셔마 이스라엘’을 외우면서, 하느님의 뜻(율법)에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들은 메주자를 문설주와 대문에도 붙여 놓는데, 이는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메주자를 탈출하던 날 밤, 낮에 잡은 파스카 제물의 피를 발라둔 장소에 붙여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파괴자가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린 피를 보고 지나친 것처럼, 파멸을 피하려면 언제나 메주자에 담긴 율법 곧 하느님의 뜻을 지켜야 하고, 그렇게 이스라엘이 그분의 율법에 충실하면 어떤 파괴자도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하리라는 것을 함축하여 알려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는 이러한 관습이 이집트 탈출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은연중에 알립니다. 우회로를 선택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으로,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 아모리족과 히위족, 여부스족이 차지한 땅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해안 길인데, 이 길이 통과하는 해안 쪽은 이미 필리스티아인들이 점령한 땅이었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바다 너머에서 건너 온 민족으로 덩치가 대단히 크고 난폭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도 가나안 땅을 호시탐탐 노리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울과 다윗 임금 시대에도 이스라엘 민족과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필리스티아인으로 다윗과 대적한 골리앗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막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대열도 가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만나면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시어, 그들을 갈대 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십니다(13,17-18 참조). 그리고 광야에 있는 시나이 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그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자 하십니다. 광야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지속되는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작은 어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다가 결국 40년이라는 긴 광야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법을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가로질러 가는 빠른 해결책을 마련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런 길에는 아주 큰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워가더라도 가장 안전한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 길에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 길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다시 한 번 알려 주십니다. 지금 만나는 어려움은 더 큰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당신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배려를 잊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 내지 못한 채 하느님을 원망하며 시간을 낭비한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기회를 계속 놓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연되는 것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우리네 탓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우리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가 지연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시기 위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모습으로 함께하십니다. 또 다른 40년 광야 생활을 하고 계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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