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말씀 피정 (20) 시나이 산에서 주신 십계명 지난 호에서는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네 번째 계명부터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은 탈출기에 나오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을 하나로 보지만, 여기서는 탈출기의 순서대로 십계명을 다룹니다. 그래서 계명 순서는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미리 밝힙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은 할례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몸에 새겨진 계약의 표징 할례와 함께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창세 2,3)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 작업을 하신 뒤 이렛날에 쉬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이렛날’에 하시던 일을 다 이루셨다고 전합니다(창세 2,2 참조). 이렛날에 쉬셨는데도 그동안 하시던 일을 그날 다 이루셨다는 말은 안식이야말로 창조의 마지막 단계라는 의미입니다. 곧 안식으로 모든 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는데, 네 번째 계명은 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안식일을 하느님의 날로 떼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만큼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쉬어야 합니다. 이 휴식은 자신뿐 아니라 집안의 모든 사람, 나아가 종과 가축,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생산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욕심을 부리면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 하느님과 함께 거룩한 날을 보내지 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쉼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결코 거룩하게 지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제4계명과 관련된 안식일을 주님의 날, 곧 안식일 다음 날이며 주간의 첫날인 주일로 옮겨 지냅니다. 주일은 단순히 성당에 가는 날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쉬는 날입니다. 쉬면서 한 주간의 일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안식일, 곧 주일을 제대로 지키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계 때문에 쉬지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쉼에서 소외되어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온전히 지킬 수 없게 하는 사회를 바라보면 참으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참 중요할 것 같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5계명: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우상 숭배와 관련한 두 번째 계명을 주십니다. 이 계명을 잘 지켜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 섬기는 이들에게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이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이들은 그들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에서 오래 살 것입니다. 제5계명에서 ‘공경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레’를 번역한 말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는 이 단어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마찬가지로 부모에 대한 공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에게 생명을 부여받지만, 부모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부모의 형태가 다양해져 단순한 혈육의 의미를 넘어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의 부모이든 인간은 부모 세대에게서 전해지는 다양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지 않으면, 결코 현재의 공동체 안에 녹아들 수 없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모든 이)를 공경하여 그들에게서 올바른 유산, 곧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5계명은 단순히 자녀를 위한 계명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부모를 위한 계명이기도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할 수 있으려면, 먼저 부모가 공경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부모가 여러 이유로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여 고통을 겪는 자녀가 많습니다. 다양한 가정 문제로 교육을 올바르게 받지 못하는 자녀도 많습니다. 이런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제5계명은 부모로서 올바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올바른 부모 상(像)은 올바른 하느님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자녀는 부모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부모 공경의 연장선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우리 문화에서 제사가 일종의 미신 행위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조상을 신으로 여겨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 조상에게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연장선에 있다고 여긴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제6계명: 살인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 계명은 같은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올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국한하여 지켜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대목에서 원수나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가 나옵니다. 그러나 탈출기의 제6계명에는 아무런 조건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어떤 경우라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고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만 달려 있기에,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인간의 생명이 그만큼 존엄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생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갖습니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사형 제도나 인간 생명을 이용한 연구와 실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모든 일에 부정적 견해를 밝힙니다. 이 계명과 관련하여 마태오 복음서는 좀 더 엄격한 가르침을 내놓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도 살인 행위라고 봅니다(마태 5,22 참조). 사람의 생명이란 육신의 목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한 사람의 모든 인격을 포괄하여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 역시 살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마태오 복음서는 이 계명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합니다. 곧 이 계명을 ‘화해하라’는 가르침으로 확장합니다(마태 5,21-26 참조). 남을 살인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남이 자기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화해를 청하는 것 또한 제6계명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태오 복음서는 이 계명의 의미를 넓힙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죽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남에게 잘못해서 죽을죄를 지은 적은 없는지 반성해 보고 적극적으로 뉘우치며 화해를 청하라고 가르칩니다. 제7계명: 간음해서는 안 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정은 모든 사회의 기반이 되는 가장 중요한 기초 공동체입니다. 가정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혼인 계약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간음은 올바른 혼인 관계를 거슬러 가정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중대한 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일부다처제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기 때문에(신명 21,15-17 참조) 구약성경은 남자의 경우 다른 이와 혼인한 여인과의 관계만을 간음으로 규정하고, 어느 정도 선에서 이혼을 허락하기도 합니다(신명 24,1-4 참조). 하지만 혼인 관계를 깨트리는 간음에 관해서는 사형이라는 극한 처분을 내릴 정도로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취합니다(레위 20,10; 신명 22,22 참조). 신약성경은 간음과 관련한 계명을 더욱 엄격히 적용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경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합니다(마태 5,28 참조). 성 문화가 개방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 계명은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가정 공동체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어떤 사회도 건전하게 서 있을 수 없으며, 간음은 가정 공동체를 깨트리는 가장 큰 죄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정결을 지킬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히브 13,4).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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