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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8: 유다의 배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788 추천수0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8) 유다의 배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21-30).

 

이 복음 구절을 읽은 후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의문 중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오랫동안 그분과 함께하여 그분의 인격에서 나오는 빛의 광채를 발견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의 신적 권능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 중 하나가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기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어쩌면 스승은 적들이 자신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그 제자에게서 미리 알았어야 하지 않는가? 나아가 ‘그 제자 외에도 모든 이가 그분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표현될 수 있는 개인의 깊은 공감 의식이 깔려 있다.

 

 

제자들의 기대와 달랐던 메시아의 참모습

 

제자들이 공생활을 통틀어 예수님에게 가진 기대를 투영하는 상(像)은 구약성경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말씀에 따르면 그분은 특히 로마인을 의미하는 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 예루살렘에 왕좌를 세우고 다윗 임금처럼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왕국’과 다른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분은 정치적이거나 전의에 불타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하느님의 적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평화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평화는 자신을 버리는 것과 사랑에서 나온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라는 질문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0,21)라고 말한 구절은, 큰 위력으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매우 강렬한 희망으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동요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아가 우리는 돈을 맡고 있던 유다가 부정직하게 돈을 착복한(요한 12,6 참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유다가 특별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보면 제자들 모두 그분을 배신한 셈이다. 위험이 닥친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러한 점을 꾸밈없는 어투로 말한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의 동요를 드러낸다.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4,29). 베드로의 이 맹세는 다른 맹세를 통해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로 바뀐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마르 14,71). 이것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며, 배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답이다.

 

거기에 사도들이 경험한 인간적 나약함까지 더해진다. 베드로는 격렬한 성품과 무분별함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는 까칠하고 회의적이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당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돌아간다면, 제자들은 자기 성격 때문에 아주 쉽게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갈’(마태 26,31 참조)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신앙의 밤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뿐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주님을 배신할 위험에 처해 있지 않은가? 사도들이 한 일은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바로 공공연하게 만연한 무신론이 몇 가지 사항을 말해 준다. 이 시대는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쓴 휘황찬란한 미래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한 공동체에서 온갖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의 관점으로 자신의 신앙을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거대한 정치 권력과 연결되어 신을 부정할 뿐 아니라 증오하는 일이 확산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비록 인간 정신의 역사가 신앙에 등을 돌리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 각자는 신앙 안에 신실하게 머무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은총은 분명히 내 안에 있다. 삶의 여정에서 나는 신앙의 깊이와 따스함을 느끼지만, 신앙이 나에게 어떤 것도 말해 주지 않는 시기도 닥쳐온다. 신앙이 나를 어떻게 이끄는지 느끼는 시기에 오히려 신앙은 나를 압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앙이고 뭐고 간에 나를 가만 좀 내버려 둬!’라고 말한다면, 이는 큰 유혹임에 틀림없다.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습과 신앙의 확고한 신뢰가 축 쳐진 어깨처럼 맥없어져 버릴 때, 제멋대로 하려는 위험을 느낄 때 우리는 다음을 상기해야 한다. ‘조심해! 너는 지금 성경에서처럼 제자들이 있던 그때(“때는 밤이었다”), 그 상황에 있는 거야.’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 내면이 ‘밤’처럼 어두워질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과 주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이다.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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