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남의 죄와 나의 죄 -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2)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15년 전에 제가 보좌신부로 있던 주교좌 성당에는 직장인과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위한 주일 밤(9시) 미사가 있었습니다. 제단에 가까이 가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요? 교우들은 뒷자리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저는 넓은 성전에 다 흩어져 앉으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앞쪽에 앉아 주십시오” 하고 독려하곤 했습니다. 그런 막내 보좌신부의 마음을 아는 듯 하루는 본당 총무님이 나섰습니다. 강론대가 있는 왼쪽 앞줄부터 좌석을 채워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넓은 주교좌성당 왼편은 앞줄부터 끝줄까지 다 찼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은 예물 봉헌을 해야 하는 본당 총무님 부부만 앉게 되었습니다. 늦게 도착한 신자들이 총무님 부부만 앉은 오른편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일상의 시작 질문을 이렇게 던집니다. “여러분은 성당에서 매주 같은 자리에 앉는 경향이 있나요? 매주 자리를 바꾸나요? 미사를 드릴 때 어디에 앉습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성전 앞쪽으로 나아가기란 두렵습니다. 어떤 경외심이 있기 때문일까요? 신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외진 곳에 앉고 싶은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번 호 성경 본문에는 기도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호의 비유를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현하면, 바리사이는 성전 앞자리에 당당하게 앉아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왼쪽 저 구석진 자리에 차마 머리를 들지 못한 채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제단 가까이 가기에 자신의 죄가 너무 큰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마지막 비유는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으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를 처음 들은 군중은 바리사이를 거만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는 신심 깊은 이들이라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군중은 그렇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성전에 나타날 것 같지 않던 세리가 등장한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이 세리가 뒤에 등장하는 자캐오처럼 회개를 드러내거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보속으로 재산의 반을 내어 놓겠다고 선포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저 세리는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고 떠났을 뿐입니다. 조용히 말입니다. 보속으로 어떤 것을 하겠다고 자백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롭게 되어 돌아간 이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고,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항)입니다.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만스럽게도 자신을 이렇게 높이는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1850항)입니다. 그런데 이번 호 비유에서 바리사이는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타인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루카 18,11).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 오늘날 대죄와 소죄의 구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별한 행위만으로 대죄가 되는지 여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그 결과로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지속되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봉사하려고 노력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지금 ‘혼잣말’로 남의 죄를 재단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리사이의 몸은 성전 앞에 있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오히려 성전 뒤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대죄인 세리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답합니다. “두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은, 세리는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으나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 눈멀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군중도 바리사이처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군중을 동일시하시어 바리사이가 보지 못한 것을 군중도 알아채지 못한다며 비유 마지막 부분에서 알려 주십니다. 케빈 페로타의 표현을 빌리면, 제자들과 군중은 “예수님의 계획에 말려든 이들, 세리에 더 가까운 이들”입니다. 15년 전의 주교좌 성당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제대 가까이 앉아 열심히 기도하는 교우들이 저는 그저 좋았습니다. 일관되게 뒤쪽 구석에 앉던 청년들이 미워 보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들 마음에 숨겨진 사연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그 자리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저는 저의 죄가 아닌 그들의 죄를 판단했지만, 멀찌감치 뒤에 앉은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죄를 더 깊이 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자리에 초대하여 데리고 오신 분이 하느님이신데, 저는 제 죄를 보지 않고 그들의 부족함부터 보려 했습니다. 제 모습이 정확히 바리사이를 닮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면서 먼저 자기 죄를 봐야겠습니까, 아니면 남의 죄를 봐야겠습니까? 기도는 남의 죄를 보고 싶어 하는 교만한 시선의 방향을 바꾸어 자기를 향하게 하고, 그 양심의 자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훈련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동방의 오래된 기도 전통은 우리의 기도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반성의 방향은 어느 쪽이어야 하는지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최성욱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200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성윤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리처드 M.굴라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제자 됨의 영성》(2015)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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