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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착한 이웃 -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470 추천수0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착한 이웃 - 이들 중에 누가 구원받은 자입니까? (1)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4-37).

 

“착하다. 썰렁하다. 농담은 잘 못 하면서 끊임없이 시도한다. 은근히 순진하다.” 저에 대한 동기 신부들의 묘사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묘사할 것 같습니까?” 케빈 페로타는 6주간 성경 나눔의 4주차를 시작하면서, 이웃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이웃은 나를 어떻게 표현할까요?

 

이웃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생각보다 객관적일 때가 많습니다. 편협한 시각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겠지만, 특히 함께 사는 신학생들의 상호 평가가 냉혹하리만큼 정확하다는 사실에 저는 한 번씩 놀랍니다. 내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가 더 잘 보이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이웃의 날카로운 시선은 우리에게 도덕적 자기 성찰을 제공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착한 이웃 되기(도덕성, morality)와 무관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영성, spirituality)은 한낱 내적 개인 수양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단순히 옳고 그름(right/ wrong)이나 죄를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人’의 비유는 전인적 인간(human person)으로서 선한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선한 이웃이 되어 주었는지 물으십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영성), 하느님께서 돌보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관심을 가지고자 하시는 방법으로 착한 이웃이 되어 줄 것입니다(도덕).

 

이 비유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인 “Go and Do Likewise(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윌리엄 스폰(William C. Spohn)의 책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오늘날 윤리신학이 어떤 이유로 성경을 중요시하게 되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일상에서 유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 줍니다. 그분의 말씀은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같은 형태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일상에 적용하기 위해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이 비유는) 신심의 외형적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차이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계명에 관해 토론하지만, 도움을 줘야 할 사람들과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구분합니다. 경건한 이에게 선을 행하고 죄인에게 선을 행하지 말라는 집회 12,1-7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율법 학자는 자신의 목록에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을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취급하시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강도당한 사람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신분을 대변하는 옷이 벗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지나간 사람은 사제였습니다. 케빈 페로타가 묻습니다. “왜 멈추지 않았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청중도 물었을 법한 질문입니다. 몇 가지 이유 중에 하나는 신분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죄인 무리에 속한 자라면 도와서는 안 됩니다(집회 12,7 참조). 더구나 죽은 사람이라면, 부정한 시체에 손을 댄 탓에 자신도 부정해집니다(민수 19,11 참조). 길을 멈추면 자신도 강도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의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는 중이라면, 더구나 시체에 손이 닿아 부정해진다면 정화의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의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는 당분간 성전에서 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푼 사람은 죄인 무리에 속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설명하실 때 사용한 단어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지니신 마음을 표현하실 때 사용한 단어와 같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동정심이 있습니다. 호세 6,1의 말씀과 동일하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섰으며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요즘 미국은 동성애자들의 결합(또는 혼인)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시끄럽습니다. 교회는 동성애 행위를 무질서라고 가르치고 자연법에도 어긋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57항 참조). 동성애 문화에 동조하는 것도 그리스도인 복음 생활에 합당하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밝힙니다. “동성애는 생명을 전달하는 보완적 결합이 아니다. 그러기에 동성애는 또한 복음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이라고 일컫는 자기 증여의 생활에 대한 부르심을 훼파하는 것이다”(〈동성애자 사목에 관하여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7항).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유를 읽으며 문득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다면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는가!” 작은 형제회 소속 미카엘 저지 수사 신부는 뉴욕주 소방서의 채플린(chaplain: 교도소 · 병원 · 군대 등에 소속된 사제)이었습니다.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알려진 미카엘 신부는 2001년 뉴욕에서 9·11 테러로 무너진 빌딩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다 선종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섰으며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묘사할 것 같습니까?” 당시 동료 소방관들은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미카엘 신부를 부정한 사마리아인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실천한 아름다운 이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은근히 순진한’ 저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실지 궁금합니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다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Go and Do Likewise)” 하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서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아픈 데를 싸매 주어라” 하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호세 6,1 참조).

 

* 최성욱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200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성윤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리처드 M.굴라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제자 됨의 영성》(2015)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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