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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회식 자리 - 하느님의 초대 (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137 추천수0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회식 자리 - 하느님의 초대 (2)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루카 14,16-20).

 

추수 감사절과 같은 명절날 갈 곳 없던 유학생 시절, 가족 식사 자리에 초대해 주던 연세 지긋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 초대가 소중했던 까닭은 단순히 잘 차려진 서양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먼 타향에서 홀로 있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 주는 그리스도인의 환대(歡待)를 체험하고, 그 만남 가운데 ‘신의(fidelity)’로 맺는 믿음의 관계를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고 초대하는 가족 됨의 식사 자리,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지난 호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자신의 큰 재산(탈렌트)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인을 ‘신뢰’했던 충실한 종은 믿음으로 그 위험을 감수했지만, 그렇지 못한 종은 자신의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이번 호 초대와 거절의 비유에서도 그 핵심은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우선순위’라는 주제도 만납니다.

 

오늘은 회식 자리에 대한 일상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진정 참석하기 싫은 모임에 초대받았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꾹 참고 참석한다, 가긴 하지만 즐겁지 않다는 티를 확실히 낸다, 못 가는 사유를 생략한 채 정중하게 사양한다, 친척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핑계를 댄다.”

 

청년들의 대답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격대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마 자세히 설명은 못하고 정중하게 사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식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기쁘게 참석하고 싶은 모임이 있는가 하면, 가자니 그렇고 빠지기에는 서운한 자리가 있고, 억지로라도 가야만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을 선택하는 행위에서 ‘신뢰’와 ‘우선순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자유가 표현됩니다.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이 만만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이 시작 질문은 단순히 회식 자리에 대한 참석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초대했는가?’ 곧, 초대한 주인을 어떻게 여기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 주인과 나의 관계성도 묻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초대와 응답에는 ‘정체성’과 그와 나의 ‘관계성’이라는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손님을 초대하는 이 비유를 접할 때, 성경 공부에 익숙한 사람들은 우선 고대 근동 지방의 초대 관습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많은 경우, 초대장을 두 차례 발송합니다. 첫 초대장은 잔치에 참석할 사람의 숫자를 가늠하기 위한 것입니다. 음식량의 조절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두 번째 초대장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초대장이 발송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첫 번째 초대장에서 가겠다고 응답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두 번째 초대장을 받고는 하나같이 참석할 수 없다는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늘어놓는 이유가 모두 납득할 수 없는 핑계라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초대한 주인과 잔치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지만, 마태오 복음서(22,1-10)에 의하면 그것은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입니다. 가령 그렇다면 이를 거절하는 것은 모욕에 가까운, 불쾌한 일입니다. 성서학자들이 설명하듯이, 혼인 잔치 참석을 거절한 사람들의 변명은 터무니없는 내용입니다. 밭을 사거나 소를 사는 일이라면, 이미 그들은 신중하게 날짜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또 본인 혼인식 날짜가 잡혔을 정도면 이미 양해를 구했거나 오히려 먼저 그를 초대했어야 합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신뢰가 깨졌고,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또 다른 초대장을 발송합니다(루카 14,22-23). 이번엔 마음이 병들고 약한 자들을 모아 오라고 종들에게 명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앞에 초대한 사람들과 여러모로 비교됩니다. 이들은 가난하기에 가서 살펴볼 밭이나 소가 없습니다. 또 혼인 잔치를 열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 밖의 사람들도 불러들입니다(루카 14,23 참조). 그런데 강압적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설득합니다. 그들이 갑작스럽고 의심스럽기까지 한 초대에 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거룩한 잔치의 초대는 가난함과 부유함, 교회 안팎의 경계마저 무너트립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가르침에서 놀라운 점 중 한 가지는 〈교회 헌장〉에 ‘하느님 백성’이 먼저 언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이를 ‘보편적 성화 소명’(〈교회 헌장〉 39-42항)이라고 부릅니다. 특정한 직분이나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들만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이는 교계에 소속된 사람이든 교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든 다 거룩함으로 부름 받고 있다”(39항). 거룩한 삶으로 모든 이가 초대받았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에 맡겨졌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초대된 사람들의 핑계를 현대의 상황으로 표현한다면, “방금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살펴보러 가야겠네.” 내지는 “방금 새로 산 자동차를 시운전하러 가 봐야겠네”라든가, “오늘 오전에 갑자기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네” 등이 될 것입니다. 성당에 한 번 나가 보기를 권유할 때 우리가 듣게 되는 대답, 반대로 우리가 참석하고 있는 성경 공부에 한 번쯤 빠지고 싶을 때 내놓는 우리의 핑계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일터에서 종종 회식 자리가 생기곤 하는데 참석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자리에 빠질 수 있는 적당한 이유를 찾곤 합니다. 그런 경우 제가 유학생 시절 고맙게도 가족 식사 자리에 늘 불러 주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이 초대와 거절의 비유는 우리 삶에서 ‘신의’와 ‘우선순위’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나를 초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평소 그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먼저 살펴보라는 말씀으로도 다가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 최성욱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200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성윤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리처드 M.굴라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제자 됨의 영성》(2015)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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