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첫 번째로 토착화한 성경, 셉투아진타 성경과 이를 수용하는 문화의 상호 관계는 종종 ‘토착화(inculturation)’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로 성경(구약성경)과 그리스도교 태동기의 주류 문화였던 그리스-로마 문화가 만나 이룬 대표적인 토착화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진 ‘셉투아진타(칠십인역 성경)’의 번역이라 하겠다.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스무 살에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기원전 356-323년)는 불과 12년만에 그리스 반도 북부의 마케도니아에서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한 강력한 통치자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받은 교육을 토대로 자기의 방식과 문화, 곧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령지마다 고향 마케도니아의 대도시를 모방해 원형 경기장과 도서관 등을 지으면서 무려 60개의 도시를 세우고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죽자 제국은 분열되고 많은 알렉산드리아가 사라지거나 더는 그 이름으로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집트 나일 강 하류의 한 도시가 꿋꿋하게 살아남아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파로스의 등대’가 거기에 있었다. 기초부터 꼭대기까지 135미터, 40층 건물 높이의 등대는 맑은 날이면 50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운하처럼 넓은 나일 강의 하류에 있어 지중해의 모든 상선이 드나들 수 있었고, 이집트는 지중해 연안의 곡식 창고 역할을 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상선이 이 등대를 바라보고 와서 곡식을 사갔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뒤를 이어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파로스 섬에 뮤즈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학예의 여신)에게 헌정된 ‘무세이온(Museion)’이라는 종합 문화 센터를 세웠다. 시민들은 문화가 발전하려면 책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센터에 세계 최초의 국제 도서관을 건립했다. 아테네와 로도스에 있던 최고의 서적 시장에서 많은 책을 구입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도서관에서 엄청난 분량의 책을 통째로 사오기도 했다. 항구에 들어온 배에서 새 책이 발견되면 압수해 필사한 후 복사본을 돌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한 도서는 무려 70만 권에 달했다. 둘째와 셋째 규모를 자랑하던 에페소나 페르가몬의 도서관이 20-30여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것에 비하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엄청난 양의 책을 확보하는 데는 비싼 양피지뿐 아니라 나일 강 유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파피루스로 만든 종이도 큰 도움이 되었다. 유다인 디아스포라와 셉투아진타의 탄생 알렉산드리아를 세울 때부터 그곳에는 이미 유다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 정벌 때 자신을 도운 유다인들에게 새로 만든 도시의 일정 구역을 거주 지역(diaspora)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흡수하여 개방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 동화 과정에서 많은 유다인이 자기 언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려 그리스어만 구사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였던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aeos II, 기원전 308-246년) 왕에게 도서관 차원에서 유다 율법을 번역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 의견을 받아들인 왕의 초청으로 유다인 공동체 열두 지파에서 각 지파별로 원로 여섯 명이 번역자로 선출되었다. 번역자 일흔두 명이 파로스 섬의 왕궁에 모여 각자 방 하나씩, 일흔두 개의 방에서 72일 간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했다. 번역을 마치고 나서 완성본을 비교하니 기가 막히게 일치해 모든 시민이 찬사를 보내며 도서관에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전설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그래서 번역이 기원전 2세기경 백여 년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설은 무엇을 강조할까? 아마도 새로운 그리스어 번역본에도 히브리 성경이 지닌 하느님의 영감과 성령의 감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설에 따라 번역본의 이름도 ‘셉투아진타(Septuaginta)’, 즉 ‘칠십인역’이라고 불리고 ‘LXX’로 표시한다(로마 숫자로 L은 50, X는 10을 의미함. 따라서 50+10+10=70). 셉투아진타의 가치와 중요성 셉투아진타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최초의 고대 종교 경전이며, 그 엄청난 분량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더욱이 이 번역 성경은 알렉산드리아뿐 아니라 그리스어에 능통한 모든 디아스포라 유다인의 신앙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고 선교에 유용한 도구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 히브리어 전문 용어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의 표준이 탄생했기에 유다교가 그리스-로마 문화와 교류하는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셉투아진타는 초기 그리스도교를 통해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미 예수님 시대에 일반 유다인들은 정통 히브리어에 능숙하지 못하여 아람어로 대화했으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로마 제국의 다른 민족들은 그리스어는 알아도 히브리어는 아예 몰랐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인은 히브리어 원전이 아니라 거의 셉투아진타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로마 11,1)임을 자랑하는 사도 바오로도 히브리 성경이 아닌 셉투아진타에서 주요 구절을 인용했다. 루카를 비롯한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도 여기저기서 셉투아진타의 문체와 표현을 모방했다. 사도 2,14의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을 귀담아들으”라는 표현이나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사도 2,15-39; 3,12-26 참조)는 셉투아진타의 문체를 모방한 것이다. 마태오는 이사 7,14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어 본문에 나오는 셈족 용어 ‘알마(젊은 여자)’가 아니라 셉투아진타에 나오는 ‘파르테노스(동정녀)’를 사용한다(마태 1,23 참조). 욥기 19,25-26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셉투아진타에는 분명히 부활이라는 어휘가 쓰였다. 이러한 예에서 드러나듯이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후, 1-2세기의 유다인들은 셉투아진타가 히브리어 원문에 없는 내용을 첨가하거나 생략하였기에 부정확한 번역이며 성경의 내용을 교묘하게 왜곡했다고 하여 이를 배척했다. 이러한 경향은 루터 이후 개신교가 5-9세기경에야 완성된 마소라본 히브리어 성경을 유일한 구약성경의 원전으로 인정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1947년 사해 근처 쿰란 동굴에서 사해 사본이 발견된 후 셉투아진타가 마소라 텍스트와 다른 종류의 히브리어 본문을 원본으로 삼았고, 번역자들이 원문을 매우 신중하고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셉투아진타의 중요성이 재평가되었다. 셉투아진타에 대한 평가는 유다인이나 그리스도교의 종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도 히브리어 성경이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 중에 하나인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 성경이 더는 한 민족의 경전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화권 전체에서 경전으로 인정받는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성경이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한 언어권으로 들어오면서 그 언어에 담긴 사상적 틀도 성경을 해석하는 데 도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빛과 어둠을 다음 호부터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월호(통권 466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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