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은 보에티우스
철학 개념을 통해 표현된 성경의 가르침 우리나라처럼 무능하고 부패한 자들이 권력을 쥐거나 득세하는 세상을 보면 ‘왜 선한 이들은 고통을 받고, 오히려 악한 이들이 승승장구하는가?’ 하는 탄식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다. 이러한 의문은 전지전능하고 전선全善한 절대자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강력한 형태로 제기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에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악과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선함과 전능함을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은 욥기, 예언서, 그리스도의 수난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이 물음에 답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고통 해석은 종종 신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에게 설득력을 가지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해서 각 종교의 틀을 벗어나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책이 바로 로마 최후의 철학자라 불리는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5?)의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이다. 보에티우스의 정치적 성공과 몰락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직후 로마의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난 보에티우스는 일찍부터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로 유학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모두 배웠다. 로마로 돌아온 그가 박학한 지식과 훌륭한 인품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자, 당시 로마를 점령하고 있었던 동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리쿠스(454-526)가 그를 중용했다. 동고트 왕국 내의 기술적인 문제부터 재정 문제, 종교 간의 충돌 문제까지 맡겨진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결한 그는 승승장구하여 40대 초반에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 반면 적대자의 수도 그만큼 늘어났다. 특히 동고트족의 부패한 귀족들은 강직한 보에티우스를 몇 차례나 회유하고 모함했지만 모두 실패하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은 건재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의 로마인 관료들이 같은 핏줄에 속하는 동로마 제국과 내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원로원 의원 알비우스가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하게 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이 혐의가 모함임을 확인하고 뛰어난 웅변술로 그를 변호했지만 적대자들은 오히려 그 변론을 이용하여 보에티우스를 반역의 주동자로 몰았고, 불안해진 테오도리쿠스는 보에티우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보에티우스는 하루아침에 사형수가 되어 파비아의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인간의 행복과 고통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보에티우스는 앞서 언급한 선한 사람의 고통이라는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며, 옥중에서 《철학의 위안》을 저술한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의 여신과 대화하며 인간의 행복을 성찰하는 가운데,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고통의 문제를 풀어 나간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악덕에 맞서 투쟁하고, 덕을 장려하며, 심판하시는 신을 끊임없이 찾는 데 있다고 결론짓는다. “필멸하는 존재(인간)에게는 손상되지 않는 의지의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의지에 상과 벌을 제시하는 법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예지하는 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찰자요, 항상 현재하는 그 시선의 영원성은 선인들에게는 상을, 악인들에게는 벌을 주면서 우리 행위의 미래의 성질과 함께 가게 된다. … 그러므로 너희는 악덕을 거부하고 덕을 키워라. 올바른 희망으로 정신을 들어 올려라. 저 높은 곳으로 겸손된 기도를 드려라. … 너희는 바르게 살아야 할 크나큰 필연성을 지니고 있으니, 너희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판관의 눈앞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철학의 위안》 V, 산문 6). 이 구절처럼 이 책에서는 성경이 전혀 직접적으로 인용되지 않는다. 이런 기술 방식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유언장을 쓰지 않은 그가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는지를 의심하는 이가 많았다. 위의 인용에서는 신에 대한 희망과 기도를 이야기하지만 그 신을 굳이 그리스도교의 신으로 규정할 근거는 부족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심판자로 제시하는 신의 모습은 신플라톤주의의 일자(一者)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인과 같은 철학적 개념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했던 그리스도교의 인격적 신의 표상에 더욱 가깝다. 신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심판관’으로 보는 개념에는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구약의 하느님, 그리고 사람을 시험하여 교육시키는 욥기의 하느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더욱이 신의 섭리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려는 시도에서,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인간의 자유의지 남용에서 죄에 대한 책임을 찾으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 보에티우스는 철학자로서 신학 논쟁에 개입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 등 신학적 소품을 다섯 개나 완성했기 때문에 성경을 근거로 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정통했다는 증거가 충분히 남아 있다. 철학적 용어로 표현된 그리스도교 정신 보에티우스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신학적 소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세 단계로 구성된 그의 기획은 원대하고 야심찼다. 첫째 고대 인문정신의 총체인 ‘자유학예artes liberales’에 대해 철저히 탐구하기, 둘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 셋째 이 두 철학자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사상과 조화시키기. 이 거창한 계획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두 좌절되었다. 하지만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입장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방향을 《철학의 위안》에서 제시하였다. 그 안에 담긴 신(神)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신관과 매우 잘 부합하며,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등과 관련한 사상들은 전적으로 철학에서만 오지 않고 그리스도교에서 영감 받은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악인들의 성공 앞에서 좌절하기 쉬운 선한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주려는 태도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을 연상시킨다. 철학의 전문용어와 방법론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설명하려던 그의 기획은 약 사백 년 후 스콜라 철학의 태동에 중요한 모범으로 작용했다. 그의 책과 정신에서 영감을 받은 숱한 중세 학자들이 파비아 대성당에 안치된 보에티우스의 유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존경을 바쳤다. 보에티우스의 극적인 생애가 남긴 결실인 《철학의 위안》 앞에서, 우리는 성경이 주는 가르침을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문화와 삶에서 새롭게 표현해야 할지 경건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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