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위대한 신비가의 빛과 그림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11-12세기에 캔터베리 안셀무스의 활약 등으로 스콜라 철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당시의 모든 사람이 스콜라 철학에 감동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성과 논리에 지나치게 의존해 뜨거운 가슴의 종교가 아닌 차가운 머리의 종교가 되는 것을 경고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성경에 기반한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이들의 지도자는 ‘최후의 교부’로 불리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 1091-1153)였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호의적 평가와는 달리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 또한 적지 않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성경과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베르나르두스는 1090년 퐁텐-레-디종의 작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세에 형제와 친척이 포함된 귀족 30여 명과 함께 시토 수도회에 입회했다. 시토 수도회는 대형화된 클뤼니 수도원을 비판하면서 사도 시대의 청빈과 성 베네딕도 규칙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설립된 개혁 수도회였다. 영성 훈련 기간이 끝난 후 수도회의 장상은 시토가 많은 회원으로 붐비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베르나르두스와 친지들을 클레르보로 보내어 기초를 새로이 닦도록 했다. 이후 베르나르두스는 수도원을 66개나 설립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므로 ‘제2의 시토회 창설자’로 불린다. 그리하여 그는 12세기 중엽에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베르나르두스는 베네딕도회 영성의 전통 및 관례를 따라 성경 묵상을 다른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이에 덧붙여 교부들, 예를 들면 오리게네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누스 및 대 교황 그레고리오 1세 등의 주해를 읽으며 영감을 받았다. 그의 영적 가르침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베르나르두스에게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비 외에 어떤 다른 신비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일치와 의미를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두스는 요한 사도의 말씀을 그리스도 신비의 핵심으로 여겼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그런데 베르나르두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신비를 계시하는 성경은 교회 안에서 또 교회에 의해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동화되어 완전해지려면 교회의 교리, 성사 및 전례 생활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애덕의 박사’의 하느님 사랑 베르나르두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애덕의 박사’로도 불린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성장하는 단계를 베르나르두스는 육체적 · 타산적 · 효경적 · 신비적 단계로 구분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자연 본능적으로 ‘육체적 사랑’을 지닌다. 이것이 은총에 의해 초자연화될 때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지상 생애의 사건에 초점을 두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랑은 종종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얻는 이익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비굴한 사랑인 ‘타산적 사랑’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에 따르면 더 큰 성령의 은사가 있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보는 사욕이 없는 사랑인 ‘효경적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서 사욕이 전혀 없는 사랑인 ‘신비적 사랑’이 그것이다. 그는 “신비적 사랑의 단계에 도달하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뿐”이라고 말한다. 베르나르두스는 물론 현세에서 하느님을 사랑함에는 끝이 없고 인간은 절대적 완성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더 큰 완덕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으며,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겸손의 덕이 필수적이다. 베르나르두스에 따르면, 겸손은 인간 스스로 자신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깨달은 결과로 나타난다. 또한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해진 사도는 관상가인 동시에 활동하는 인간이라야 한다. 먼저 자기 영혼의 성화를 위해 노력한 후, 다른 이들의 영혼을 성화시키는 데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두스의 안타까운 실수 베르나르두스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많은 제자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모든 면에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1146년 제1차 십자군이 주둔해 있던 에데사가 이슬람에 함락되자,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의 설교특사로서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주창했다. 그는 모든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는 자세와 순수한 용서를 실천하는 새로운 의미의 십자군을 권유했다. 그의 설교에 감동받은 많은 사람이 바로 십자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그의 설교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는 물론 금전적인 이득이나 이교도들에 대한 살상을 목적으로 한 기존의 십자군 관행을 비판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유대인을 비롯한 많은 무죄한 사람의 학살을 야기했고, 베르나르두스는 안타깝게도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스콜라 철학이 명상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앞세우는 것에도 거부감을 표시했다. 특히 아벨라르두스(Abaelardus, 1079-1142)라는 12세기 스타 강사가 논리학은 물론 신학적인 주제로 토론하면서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것을 보고 분노했다. 베르나르두스에게는 아벨라르두스가 ‘지성’이라는 추한 손가락으로 대담하게 삼위일체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교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였다. 베르나르두스는 아벨라르두스를 박해하고 단죄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신학적인 사고의 발전을 더디게 하고 말았다. 베르나르두스는 12세기 전반기 최고의 영적 스승이었다. 특히 《아가 설교(Sermones in Canticum Canticorum)》로 대표되는 베르나르두스의 신비주의는 수 세기 동안 독일,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을 거쳐 루터와 경건주의자, 이신론자, 루소와 젊은 괴테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쉽게도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그리스도교인에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남겼다. 베르나르두스는 개인적인 신심만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알려주는 타산지석으로 남은 셈이다. 베르나르두스가 그토록 비난했던 아벨라르두스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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