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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7: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어린양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6,303 추천수0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어린양

 

 

4,1부터 본격적으로 환시가 시작됩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4장은, 이제 하늘로부터 온 계시가 본격적으로 땅과 저자에게 향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에제 1,1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를 보았다.” 아마 당대의 사람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이 환시를 가능케 한다는 표현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뒤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미 1,10에서 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말합니다.

 

 

어좌, 스물네 원로, 네 생물

 

요한 묵시록 저자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하나의 어좌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어떤 분’이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시편 11,4; 이사 66,1 참조). 여기서 어좌는 그 위에 앉은 사람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상징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주교좌’라고 부르는 성당에는 주교를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 자체가 주교의 권한과 임무를 나타냅니다.

 

그 어좌 주위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고 거기에 ‘스물네 원로’가 앉아 있습니다. 스물네 원로는 요한 묵시록에서 열두 번 사용되는데, 구약성경이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지 논란이 많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많은 것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과 성가대의 상징으로 보는 것입니다(1역대 24-25장 참조). 사제와 성가대는 24개조로 나누어 하느님께 봉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물네 원로가 4-5장에서 수행하는 기능은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기능상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전에서 봉사하던 24개조로 된 사제나 성가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어좌의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4,6; 에제 1,4-14 참조). 이 네 생물은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로 묘사됩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네 복음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리옹의 이레네오 교부에 따르면, 사람은 복음서의 맨 첫머리에서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을 나타내는 마태오 복음서의 상징으로 보았고, 사자는 복음의 숭고한 면을 강조하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언급하는 마르코 복음서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황소는 사제였던 즈카르야의 이야기로 복음서를 시작하는 루카 복음서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황소는 사제가 바치는 제사의 제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성령의 선물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같다고 언급합니다. 독수리가 높은 곳에 떠 있는 것처럼 영적인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어좌 주위에 있는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은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계시를 전함으로써 하느님 곁에서 봉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쉬지 않고 외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4,8) 이 표현은 이미 이사 6,3에서 사용되었고, 지금도 미사 전례에서 사용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 대한 환시는 이어지는 어린양에 대한 환시를 뒷받침합니다. 어린양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위임받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린양은 종말 때의 심판과 구원을 이끌어 가는 상징입니다.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 어린양

 

5장에서 처음 묘사되는 것은 ‘안팎으로 글이 적힌,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5,1 참조)입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두루마리는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재앙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오른손에 있는 이 두루마리와 함께 5장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는 ‘합당함’입니다.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5,2)라는 질문은 합당한 이가 아무도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단지 어린양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은 다니엘서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까지 비밀에 부쳐지고 봉인되어 있어야 한다”(다니 12,9). 이제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게 되었다는 요한 묵시록의 표현을 다니엘서에 빗대어 본다면 마지막 때, 곧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5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어린양에 대한 묘사입니다. “뿔이 일곱”이라는 것은 어린양이 갖는 완전한 권한에 대한 표현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뿔은 권한의 상징이며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지전능하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즈카 3,9; 4,10 참조).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5,6)입니다. 상징을 사용하는 요한 묵시록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였다는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린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제 “승리하신” 어린양은 하느님에게서 심판과 종말에 관한 모든 권한을 넘겨받아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어린양에 대한 암시는 이어지는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의 찬양에서 더욱 확실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5,9).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5,12).

 

하느님과 어린양에 대한 환시는 앞으로 보일 환시가 어디에서 오는지 잘 설명해 줍니다. 이미 저자가 책의 시작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어린양에 의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입니다.

 

*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수학하였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7월호(통권 472호), 허규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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