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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19: 하느님의 기사 (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001 추천수0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하느님의 기사 (1)

 

 

묵시 19,11-21에서 소개되는 환시는 흔히 ‘하느님의 기사(騎士)’로 불립니다. 이 환시는 종말의 때를 전하는 요한 묵시록 환시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벌어진 여러 재앙과 심판에 대한 예고는 모두 이 환시를 향해 있습니다. 이 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성격이 다른 새로운 환시는 ‘하늘이 열려 있는’ 모습과 함께 시작합니다.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9,11).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다른 표현과 비교해 볼 때(4,1-하늘의 문, 11,19-하늘의 성전), 종말의 때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환시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하늘이 완전히 열려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제 이 하늘은 다시 닫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흰 말을 타신 분의 정체

 

흰 말을 타고 있는 분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하느님 기사의 눈은 “불꽃 같았”(19,12)다고 하는데 ‘불꽃 같은 눈’은 정의와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이 표현은 1,12-16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상징을 통해 저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과 하느님의 기사가 동일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결국 이 하느님의 기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또 “작은 왕관”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19,12). 왕관은 일반적으로 권력이나 힘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용(일곱 왕관)이나 짐승(열 개의 왕관)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용과 짐승은 헤아릴 수 있는 왕관을 쓰고 있지만, 하느님의 기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용과 짐승의 권력은 유한하지만, 그리스도의 권력과 힘은 무한하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와 함께 흰 말을 탄 기사는 “피에 젖은 옷”(19,13)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살해된 어린양’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이제 요한 묵시록에서 사람의 아들, 어린양, 흰 말을 탄 기사는 모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드러납니다.

 

 

하늘의 군대와 마지막 전투

 

하느님의 기사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하늘의 군대입니다.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19,14)을 입고 하느님의 기사를 따르는 이 군대는 천사들의 무리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묵시 12,7에서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등장한 것처럼 하느님의 군대도 하느님의 기사와 함께 악의 세력에 맞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 묵시록이 종말을 이야기할 때 전쟁과 심판의 이미지들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전투에 앞장서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묵시 1,16; 2,16; 19,15.21)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칼은 ‘말씀을 통한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심판하고 “쇠 지팡이”(19,5)로 다스릴 분입니다. 쇠 지팡이는 이미 2,27과 12,5에서도 나온 말입니다. 결국 쇠 지팡이를 통해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내아이와 하느님의 기사는 모두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격렬한 진노의 포도주를 짜는 확을 친히 밟으실 것입니다”(19,15). 성경에서 포도밭과 포도나무 그리고 포도주는 하느님의 백성이나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특히 포도를 수확하여 확에 넣고 확을 밟아 즙을 내는 이미지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큰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나는 혼자서 확을 밟았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일한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분노로 그들을 밟았고 진노로 그들을 짓밟았다”(이사 63,3). 이제 요한 묵시록은 구약의 하느님 모습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합니다. 구약의 하느님에게 유보된 심판은 두루마리를 건네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한이 됩니다.

 

 

악의 세력이 맞이하는 비참한 최후

 

19,17부터는 심판의 결과에 대한 환시입니다. 전쟁을 위해 모인 악의 세력들은 이제 패배하게 되고 심판의 벌을 받게 됩니다. 심판의 결과를 미리 알리는 천사의 선포는 에제 39,17-20을 떠올려 줍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벌인 마지막 전투에서 곡의 패배를 알리며 전투의 결과로 수많은 장수와 병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잔치’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합니다. 조금은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만큼 하느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 역시 확고한 승리에 대한 증거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승리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19,19부터는 사탄의 세력에 동조하고 앞장섰던 짐승과 거짓 예언자의 멸망을 묘사합니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로마의 황제숭배 의식과 관련된 상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로마의 패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심판은 우상숭배를 강요한 짐승이나 거짓 예언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미 요한 묵시록이 지속적으로 회개하라고 권고한 것처럼 우상숭배에 동조한 이들 모두가 심판에 포함됩니다. 하느님 없이 살았던,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에 동조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모든 이들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점진적으로 내려진 재앙이 보여주는 것처럼 회개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종말의 때에 그 행동에 맞게 심판과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종말과 재림을 나타내는 환시 안에 구체적인 전투의 과정은 묘사되지 않고, 전투의 결과로 악의 세력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선포와 그 선포가 실현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즉, 잔인한 결과를 통해 전투에서 벌어진 치열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1999년 수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수학하였으며(신학박사),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허규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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