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요한 묵시록을 마치며 요한 묵시록은 다양한 상징으로 채색된 환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습니다. 그렇기에 상징들의 해석에 따라, 그리고 그 상징들이 나타내는 의미에 따라서도 해석이 달라집니다. 실제로 요한 묵시록의 해석이 과거에는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한 적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피해야 할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천문학이나 점성술에 따른 해석 요한 묵시록의 내용을 천문학이나 점성술에 따라 해석하려는 경향은 항상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단지 요한 묵시록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상징들에도 적용됩니다.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은 별자리를 바탕으로 여러 상징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중심적인 상징으로 사용되는 ‘열둘’(이스라엘의 지파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두 개의 별자리와 비교되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각 별자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예를 들어, 4,2-8에 묘사된 하느님의 어좌(4,2)와 그 어좌 둘레에 있는 스물네 명의 원로(4,4),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주위에 있는 네 생물(4,6)은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요한 묵시록에 사용된 숫자 역시 별자리의 주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역사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해석 요한 묵시록의 내용을 역사나 세계사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예언으로 보려는 경향이 ‘역사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가장 먼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천 년 통치에 등장하는 ‘천(千)’이라는 숫자입니다. 숫자 ‘천(千)’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에서 이름을 따온 킬리아즘(chiliasm)은 라틴어 표현인 밀레니엄(millennium)으로 옮겨져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2000년을 맞이할 때 세계에서 보였던 세기말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이러한 해석과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천 년이라는 시기가 지나면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요한 묵시록을 실제 역사에 적용하여 이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이미 교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나 다른 여러 교부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해석의 경향은 요한 묵시록의 여러 상징이 사회, 정치 또는 교회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요한 묵시록 안에 담겨 있다고 해석하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18세기까지 상당히 자주 대두되었지만 그 이후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안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에도 시한부 종말론이나 다른 사람들과 구분된 특별한 선택을 강조하는 일부 사이비 종교들에서 이러한 해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로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에서 이러한 해석은 여전히 힘을 얻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신흥 종교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해석들이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근거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의 바탕에는 상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역사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으로 보는 경향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해석이든 아니면 앞으로 오게 될 미래에 대한 해석이든,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대한 그릇된 해석들은 과거에 또는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예언을 풀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혼자서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제대로, 바르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시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재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당시의 박해로 고통받은 신앙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은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구원을 위해 오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록된 요한 묵시록은 지금 우리에게도,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이와 같은 책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해석들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받을 이들의 수효는 이미 정해져 있고, 거기에 들지 못하는 이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거나, 상징적인 표현이 현재의 구체적인 인물을 지시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내용과 거리가 멉니다. 이러한 해석들이 명쾌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바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예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종말이 아닐 것입니다. 종말을 가장 잘 준비하는 방법은 그것이 언제 올지 그 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산다면, 비록 어려움 속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고 있다면 종말이 언제 오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 역시 - 종말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 오늘을, 지금의 삶을,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 (22,17). *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1999년 수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수학하였으며(신학박사),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2월호(통권 489호), 허규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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