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들음의 은총(1,35-51) 듣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들을 귀는 참으로 귀하다. 소리가 아니라 그 의미를 깨닫기란 참으로 어렵다. 한국 사회를 보면 더욱 그렇다. ‘진보다, 보수다’ 하고 외치고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게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진보가 무엇인지, 종북이 도대체 무엇인지 따져 물으면 ‘묻지 마’식 비난만 쏟아내는 무늬만 보수인 사람들,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왜 바꾸어야 하는지 설득력 있는 대화를 포기한 채 그저 자신들의 소리만 내지르는 파시즘적 진보 인사들. 그들에게 듣는다는 일은 요원할 테고 그들로 인해 한국 사회는 피곤하다. 요한 복음서는 제자됨의 기본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외치자 제자 둘이 그 소리를 듣는다. 들음은 찾음으로 이어지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완성된다. 만남은 객관적 두 실체의 공존만이 아니라 주관적 신앙의 고백으로 재탄생한다. 예컨대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메시아’라 고백하고, 필립보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가 기록한 분으로 예수님을 인식하며, 나타나엘은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인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시작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역사와 전통 안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날것이 아니다. 메시아, 율법과 예언서가 기록한 분,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님 또한 그러하다(시편 2 참조). 예수님을 만나 그에 대해 여러 가지 호칭을 가져다 고백하는 건 과거와 현재의 만남, 지난 전통과 지금 여기가 만나 만들어 내는 융합의 창조물이다. 제자는 예전의 고정된 사고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메시아를 볼 줄 아는 열린 사고를 가졌다. 열림은 서로에 대한 이끌림으로 연장되고 이끌림은 함께함으로써 거듭난다. 제자가 스승 예수님에게 다가간 첫 일성(一聲)이 이러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1,38) 예수님께서는 훗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15,4). 예수님을 만나는 데는 특별한 재능도 능력도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정신적 배고픔’이 필요하다. 나타나엘의 모습은 이를 적확하게 보여 준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사회와 전통 안에서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배부른 사고방식은 새로움을 감시하고 탄압하며 금지한다. ‘왜’라는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변화의 자유에 둔감하다. 그리하여 하나의 방식과 주류의 강력한 힘의 논리에 어떤 견제나 면역력 없이 매몰된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뒤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 고백하고야 만다. 나자렛은 ‘의미 없다’라며 기존 가치 체계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신앙고백이지만, 그 비현실이 나타나엘에게 현실이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제자됨의 기본이다. 공관 복음서 어디에도 나타나엘은 제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에서만 전하는 나타나엘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자리가 아닐까? 현실과의 줄다리기에서 비현실적 희망을 현실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은, 세대를 거쳐 시대를 통해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이 즐기는 정신적 배고픔이 만들어 내는 창조 행위다. 복음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아니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큰 일’을 예고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열 번 정도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 역시 유다 전통에서 종말론적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된 것이었다(다니 7,13;10,16 참조). 유다 전통에서 사람의 아들은 힘이 있어야 했고, 세상이 우러러보는 영광 가득한 인물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대적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독보적 존재였다. 유다인은 그런 사람의 아들에 집착했고, 그것으로 현실의 고단함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전통을 재구성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다(3,14; 8,28; 12,23.34; 13,31 참조). 예수님께서 예고하시는 또 다른 큰 일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요한 복음서는 이 죽음을 ‘영광’이라 부른다. 세상은 죽음을 피한다.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서는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 안에서 영광을 찾는다. 이유인즉, 우리가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역시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상 죽음은 끝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고프고 배고픈 사랑이자 열림이기에, 요한 복음서는 십자가를 영광이라 여겼다. ‘너’를 통한 영광이지 한 사람에게 집중된 영광이 아님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극복하고, 체제를 극복하고, 기존 가치 질서를 극복해야 하는 지난한 일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일일 터이다. 세상은 변화를 싫어하지만 변화하며 흘러 왔고 흘러 간다. 변화의 몸부림은 꽤나 아픈 상처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현실에 매몰되어 새롭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놓치고 만다. 상처를 기꺼이 받아 낼 수 있는 내적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현실에 대해 묻고 답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 옆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예수님이 계신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