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눈뜬장님(7,1-52) 7장의 시간적 배경은 초막절이고, 공간적 배경은 예루살렘이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을 두고 예수님과 형제들이 갈등을 겪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초막절은 추수에 대한 감사와(탈출 23,16; 34,22 참조) 예전의 광야 체험이 연결된, 이를테면 현재와 과거를 엮어 기억하는 축제다(레위 23,33-44; 신명 16,13-15 참조). 초막절은 하느님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셨는지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 것이며, 지금의 삶이 어떻게 하느님을 향해 있느냐에 대한 결단을 내포한다. 현재든 과거든, 하느님이 누굴까 생각해 본다는 건, 그분이 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셨는가에 대한 체험적 회상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직접 보고 듣는 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만들어가는 존재인 까닭이다. 다만, 보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못한 게 인간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기억하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으로서 일하고 말하시는 예수님에게 유독 적대적이었다. 대부분의 논란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고, 이 논란은 배척과 단절로 이어지곤 했다(5,16–18; 7,19.30.44; 8,37.40.59; 10,31.33.39; 11,8.53 참조). 이 논란은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요한 복음이 전해진 1세기 말엽,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여전하다. 다시 정리하자면, 요한 복음 7장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두고 펼쳐진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선한 사람인가, 속이는 사람인가(7,12), 아니면 예언자인가(7,40-44) 하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이 논란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 형제들의 태도에서 그 민낯이 드러난다. 그들은 예수님이 드러내놓고 다니시길 원한다. 예수님의 이적이 공개되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 ‘인정’이란 게 실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 앎이나 이해의 문제로 바꿔 놓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인식하는 딱 그만큼, 인간이 알아주고 이해하는 그만큼 예수님은 드러나고 알려져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타인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타인과의 단절이거나 타인을 무시하고 나아가 타인을 제거하는 짓이다(7,5 참조).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알기 위함이 아니라 의탁하기 위함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누구를 믿는다는 건, 그를 아는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얼마나 그를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다. 인간 대부분은 세상에서 지금껏 인정받은 것, 혹은 앞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들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 인정 속에 계급 권력이 똬리를 틀고, 권력에 취하거나 그것을 동경하는 이들이 그 똬리를 더욱 견고케 한다(7,47-49 참조). 안식일 계명도 그렇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본디 존재치 않았다.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축젯날은 하느님의 거룩한 날로 바뀌었고, 거룩함을 해치는 일상의 평범함은 내려놓자는 뜻에서 안식일은 행동거지를 통제하는 날로 그 성격이 굳어졌다. 여기엔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 유다 사회의 사제들이 그리 원했고 그리 강요했다. 사제들은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기원전 537년) 이후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였고, 통치자였으며 권력자였다. 대부분의 율법 금지 조항들은 원래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는 지배체제의 흔적에서 유래한다. 본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없다. ‘하지 말라’는 율법은 사회-문화적 이해 구도가 만들어 낸 것이고, 사람이 죽든 말든 ‘꼼짝 말고 있기만 하면 된다’는 근본주의적 율법 준수에까지 이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안식일에 할례를 베푸는 것을 문제 삼으신 이유는 이러한 율법주의의 위선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안식일에 과도한 노동이나 피를 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할례를 거행했다. 예수님의 지적은 논리적이었으나 유다인들에겐 거북했다. 그들의 전통을 건드린 까닭이다. 하느님의 지적을 인간의 전통이 거부한 셈이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유다 사회가 기대한 메시아는 권력자가 지정한 곳, 즉 베들레헴이라는 자리, 다윗 가문의 시작인 곳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 믿었고 믿은 바가 견고해져 당연시되었다. 그렇다면 이사 8,23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곤궁에 처해 있는 그 땅에 더 이상 어둠이 없으리라.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이민족들의 지역’은 갈릴래아를 가리킨다. 어느 관점으로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그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다윗 가문과 이민족들의 지역은 상충하고 대립한다. 예수님은 지금, 메시아를 바라보는 두 극단이 부딪히는 자리에 서 계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능력에 대해 놀라워하고 신기해한다(7,15 참조). 예수님이 갈릴래아 출신이고, 촌놈이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과 능력에 대한 의문이 그분이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깊이 고민하는 데까지 뻗어가지는 못하였다. 유다인들은 보고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고, 유다 사회의 현실논리와 계급 권력은 촌놈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대로 보고자 하셨다. 하느님을, 그분의 뜻을, 제대로 보고 지키려 하셨다. 자신의 때와 의지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셨다. 형제들이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라고 다그칠 때도, 군중이 자신을 놓고 논란을 벌일 때도 예수님은 자신이 누군지, 언제 무엇을 할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의 때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영광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 영광은 자신의 죽음이었다(12,23; 13,1; 17,1-5 참조). 목마른 자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찾아 나선다. 초막절 축제 때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다 성전 제단에 끼얹는 예식을 행했다. 기쁨의 예식이었고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제대로 살고 싶고, 제대로 믿고 싶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 또는 권력의지에 기대어 신앙을 이용하면 안 된다. 신앙이 자신의 익숙함으로 향할 때, 우린 주님이라 부르되 우상을 향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제로 교회 밖 구원의 문제를 부각시킨 카를 라너는 이런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내가 믿는 하느님이 우리 욕망의 투사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지우지 말아야 한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6월호(통권 483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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