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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앎의 폭력(9장)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6,909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앎의 폭력(9장)

 

 

8장에서 유다인들과 격정적인 토론이 있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메시아였고, 예수님은 유다인들을 살인자의 자식, 거짓의 자식, 악마의 자식으로 폄하하셨다(8,44). 그런 예수님에게 유다인들은 돌을 던지려 했다(8,59). 토론은 갈등과 폭력으로 치달았다.

 

몸을 피해 성전에서 나오다가 예수님은 태생 맹인을 만난다. 몸이 아픈 이를 보면 마음이 짠하거나 혹은 피하거나 아니면 고쳐 주려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이야기는 맹인의 ‘죄’를 문제 삼는 것으로 시작한다. ‘병은 곧 죄’라는 것이 라삐 신학에서는 일반상식에 가까웠다(5,14; 야고 5,15-16).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것은 분명 조상으로부터 하느님의 징벌이 이어진 탓이라는 게 그 이유다(탈출 20,5; 신명 5,9).

 

예수님은 태생 맹인을 고쳐 주셨고(9,1-7), 그걸 두고 바리사이를 중심으로 한 유다인들은 또다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안식일에 태생 맹인을 고쳐 안식일법을 어겼으니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게 유다인들의 주장이다(9,16). 예수님은 태생 맹인인 것이 조상의 탓도, 맹인의 탓도 아닌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신다(9,3). 하느님은 저주하시고 짓누르시며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픈 이를 돌보시고 낫게 하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분이라고 예수님은 이르신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했고 안식일법을 근거로 예수님을 소외시킨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 편에 있는가 아니면 유다인들 편에 있는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갈등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부재중에 펼쳐진다(9,8-34). 이 갈등이 예수님 부활 이후, 예수님이 더는 지상에서 살과 피를 지닌 채 살지 않을 때 예수님의 정체성을 두고 펼쳐진 이야기로 인식하는 주석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다그치는 방향으로 결론 지어졌고, 유다 사회의 기존 인식체제가 그만큼 견고하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다. 태어나면서 맹인이면 계속 맹인이어야 한다는 인식, 그래서 계속 죄인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맹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어찌 보면 이 갈등은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 시대의 ‘해석’ 문제였고, 개혁적, 급진적 인식을 갖추기에 너무나 평범한 이들의 보편적 해석이 문제였다.

 

사회적 평범함은 대개 그 사회의 권력에 종속된다. 태생 맹인의 이웃들이 그러했듯, 사회 권력을 통해 기존 인식체제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평범함은 더욱 견고하고 폐쇄적으로 변한다(9,13). 태생 맹인의 부모조차 바리사이로 대변되는 사회적 권력을 두려워했고, 자기 아들에 대한 변호를 기피한다(9,21-22).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 사회와의 갈등과 대립 속에 살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이자 메시아였지만 유일신 사상에 집착한 유다인들에게는 그 사실이 불편했다. 90년경의 얌니야 종교회의에서 유다 사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저주하고 단죄했으며 유다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태생 맹인 부모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거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비겁함이었으며, 그 두려움과 비겁함을 사회적 권력은 이용했다. 사회적 권력은 그렇게 사람들의 무한하고 창조적인 인식 작용을 가로막은 채 점점 더 견고해진다.

 

그럼에도 태생 맹인만은 달랐다. 그는 예수님이 행한 ‘사실’에 집중한다. 예수님이 누군지,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단정하지 않는다(9,25). 그는 예수님을 예언자라 고백하고(9,17) 바리사이들을 오히려 눈먼 이, 귀먹은 이로 규정한다(9,27).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을 손질하는 데 유용하다. 이 ‘사실’이 태생 맹인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9,38). 공부하고, 기도하고, 평생 수도를 한다 해도 예수님을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기에 그렇다. 이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고, 믿음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의 확장이고 증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건, ‘과거’에 머물러 ‘지금’을 상실한 데에서 기인한다. 9,34을 읽어 보자.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태중에서부터 병을 앓으면 죄인이라는 당시의 인식체제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태생 맹인은 이미 맹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는 죄인이 아닐진대, 바리사이들에게 태생 맹인은 여전히 죄인이고, 그래서 공동체에서 제거된다(9,34). ‘과거’가 ‘지금’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썩는 내가 진동하는 수구적 중얼거림만 난무한다. “저자는 눈이 멀었다, 눈이 멀었다, 눈이 멀었다.”

 

9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워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태생 맹인은 예수님을 보고 들었지만, 바리사이를 중심으로 한 유다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모세의 후손이라 율법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바리사이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듣지 못하는 건, 율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을 ‘화석이 된 하느님’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유다 사회에서 쫓겨난 태생 맹인은 다시 예수님을 만난다. 어쩌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완고함과 폐쇄성에서 해방된 이들의 특권일 수 있다. 예수님은 줄곧 하느님을 증언하고 입증하시지만, 그것을 보고 듣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다.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나아가 복음서 전체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제 행동거지에 대한 윤리 도덕적 판단에 있지 않다. 죄의 본질은 모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자신이 가진 얄팍한 지식과 정보로 안다고 우겨 대는 데 있다. 대개 그 지식과 정보는 사회적 권력이 오랫동안 재단하고 설계한 획일적이거나 편향적인 것임에도 말이다. 태생 맹인은 ‘모른다’고 했고, 모르기에 ‘믿는다’고 했다. 몰라서 기존 인식체제에 기생하는 태생 맹인의 부모나 그 부모가 환생한 지금의 ‘우리’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거부하고 단죄하고 죽일 수 있는 비겁함의 주인공일 수 있다.

 

지리멸렬한 과거에 언제까지 ‘지금’을 저당 잡히며 살 것인가. 나는 도대체 어떤 예수님을 원하는가, 나는 도대체 예수님을 원하기는 한 걸까, 또한 믿고는 있는 걸까, 나는 도대체 예수님을 알기는 한 걸까…. 이 질문이 나를 해방시키고 나의 눈을 제대로 뜨게 만들 것이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0월호(통권 487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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