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수난받는 하느님(18,1-38) 예수님이 보여 주는 수난의 길은 자유로움의 극치다.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겟세마니로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누구도 강요하거나 청한 것이 아닌 예수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 유다를 중심으로 한 세력, 그들의 구성이 꽤나 흥미롭다. 로마 군대를 비롯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 그들은 만나서도 안 되며 만날 수도 없다고 저들끼리 강변하는 무리다. 예수님을 잡는 순간, 그들은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 머문다. 저들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지점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시작된다. 요한 복음에 예수님은 빛으로 묘사된다. 어둠이 가득한 밤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등불과 횃불로 상징되는 빛을 가지고 왔다. 빛을 흉내 내는 무리가 참된 빛인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런 장면을 두고 혹자는 세상과 종교의 대립을 말하며 참된 진리를 전하러 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의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지만 전적으로 맞는 건 아니다. 요한 복음은 이원론을 필두로 한 영지주의에 저항한다. 하느님이라 자처한 인간 예수, 하늘과 땅이 온전히 하나로 맞닿아 있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유다 사회는 거부했다. ‘감히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라니!’ 그들에게 하느님은 저 천상에 유폐된 존재였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 당당히 나선다. “누구를 찾느냐?”라고 직접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나’임을 밝힌다. 모세에게 나타난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당신을 드러내셨듯 예수님은 스스로 하느님임을 계시한다. 그런 예수님 앞에 무리는 뒷걸음치다 넘어진다. 신적 현현 앞에 선 인간의 나약성이 제대로 드러났다. 예수님은 지금 유다 사회의 신앙적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다. 그것도 가장 실패한 모습으로, 죄인으로 낙인찍혀 유다 사회로부터 제거의 대상이 된 채로, 예수님은 땅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이야기한다. 실패와 제거의 상징인 예수님 앞에 무기를 들고 있음에도 넘어지는 세상 권력의 나약함은 요한 복음이 그리는 승리의 방식이다. 베드로가 나서서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을 통해 이루려는 야훼의 현존 방식을 가로막는 꼴이다. 칼을 휘두르는 것은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세상의 방식이고, 사랑으로 세상을 껴안으려는 예수님의 자기양도를 폄훼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아버지 하느님이 주신 잔을 받아 마시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잡히는 건, 아버지 하느님을 어둠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논리에 정확히 내어 바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한나스의 집으로 끌려간다. 예수님은 이미 성전이라는 공개적 · 공식적 자리에서 유다인들과 논쟁했고, 그 논쟁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10,22-42). 한나스의 집은 공식적인 대사제의 집이 아니었다. 그는 6-15년까지 대사제였고, 예수님의 신문이 펼쳐진 30년경의 대사제는 카야파였다. 예수님은 지금 ‘불법적으로’ 한나스 앞에서 신문받는다. 스승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은 이런 불법의 자리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외치는 베드로, 유다 사회의 숨겨진,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 앞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베드로의 비겁함은 스승의 불법적 신문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예수님은 잡힐 때 ‘나다’라고 말했지만, 베드로는 지금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며 스승과 대척점에 서 있다. 스승을 모른다고 하는 건, 야훼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이며, 하느님을 모르는 건, 결국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제껏 살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역사는 ‘만약’을 허용하지 않는다지만,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베드로를 잡아다 신문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지금 한나스의 집에서 자행되는 불법적 신문은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질투의 신문이었다. 예수라는 인물이 가지는 유명세와 인기몰이는 유다 사회의 주류와 권력층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고, ‘새로운 권력이 아닐까, 행여 내 권력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며 두려워하는 세상의 질투는 한나스의 집에서의 신문으로 더욱 구체화된 것뿐이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가르쳤다. 갈릴래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유다 사회 전체에서 가장 공적인, 그래서 갈릴래아 시골뜨기 예수님을 비난하고 거부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조차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공개적이고 개방적인 가르침이라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듣는 귀가 없는 이들의 악다구니가 신문받는 예수님 앞에서 여전히 쏟아진다. ‘도대체 당신의 가르침이 무엇이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애당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사제’라는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예수님은 당당히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항변했다. 그런 예수님의 뺨을 때리는 성전 경비병은 가르침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대사제의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예수님을 이해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되지 않을까.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서로가 사랑하길 바라는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인간적 삶 안에 완벽히 용해되어 스며들었다. 세상은 믿음과 사랑보다 권력과 계급의 차별로 질서를 잡기에 바빴고, 권력과 계급이 믿음과 사랑으로 무너지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제 빌라도에게 끌려간다. 유다인들은 총독 관저 밖에 있었고 예수님은 안에 머문다. 총독 관저 밖, 파스카를 위한 정결에 유독 세심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지만, 총독 관저 안에 머무는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지 못한다. 총독 관저 밖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끌고 가려 하지만, 총독 관저 안의 빌라도와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죄에 대한 빌라도의 신문은 싱겁다 못해 가볍지만 진리에 대한 그의 질문은 무겁고 깊어서 답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밝혔다.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진리를 앞에 두고도 깨치지 못하는 빌라도는 요한 복음을 읽는 독자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우린 진리를 깨치고 있는가? 우린 총독 관저 밖, 제 잇속에 어긋난다고, 제 이해를 벗어난다고, 제 익숙함을 무너뜨린다고 말하는 자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투명함이 아닐까. 예수가 유다인의 임금으로 고발된 건, 유일한 임금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유다 사회가 로마 황제를 임금이라 외치는 위선이 드러난 가시적 사건이다(19,15). 제 잇속을 챙기려 진리의 세상을 거부하고 제가 믿고 바라는 것조차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거짓, 그건 원죄의 논리이기도 하다. 예수의 신문은 이런 거짓과 탐욕, 그리고 이기심을 드러내는 장이 된다. 빌라도는 “이 사람이오”(19,5)라며 죄 없는 예수님을 넘겨줄 것이다. 태초에 하느님은 사람을 찾으셨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그 답을 빌라도가 대신한다.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행보는 역설적이게도 태초의 인간, 그 모습으로 방향지어진다. 숨었던 사람이 밝히 드러나는 자리, 끊겼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다시 이어진다. 예수의 수난으로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인간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8월호(통권 497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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