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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1,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289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1,1)

 

 

이사 1,1-2,5을 읽어 보면,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 전체의 요약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성가 반주를 할 때에 전주에서 노래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을 들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1,1-31에서는 주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고, 2,1-5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에”(2,2) - 1장에서 선고한 심판이 다 이루어지고 또 그 후에 - 이루어질 구원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즉 1,1-2,5의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는 심판을 거쳐 그 후에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 1-66장 전체의 요약이자 이스라엘 예언사 전체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대략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심 판                구 원

이사 1,1-31         이사 2,1-5

이사 1-39장         이사 40-66장

유배 전 예언자들   유배 후 예언자들

 

 

구약성경 예언의 역사는 ‘심판–구원’의 흐름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을 크게 둘로 나누면 유배 전 예언자들과 유배 후 예언자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유배 전 예언자들은 대체로 심판을 선고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남 왕국 유다의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유배 전 예언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살다가는 망한다는 것이 그들의 선포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아 시대에도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마태 24,38) 하다가 멸망했다고 하지요. 예언자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도, 남 왕국 유다도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무너지고 나면 예언자들은 즉시 구원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제2이사야 이후로 여러 예언자가 멸망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신다고,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멸망 선포를 믿지 않았던 이들이 멸망 후의 구원 선포는 잘 믿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예언자들은 희망을 선포합니다.

 

구약성경 예언의 역사를 조망해 보면, ‘심판–구원’이라는 큰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은 매우 뚜렷해서, 에제키엘 예언서 같은 경우 책 한 권 안에서 선포 내용이 중간에 바뀝니다. 에제키엘이 예루살렘 함락 이전부터 그 직후까지 활동했기 때문이지요. 기원전 592년경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는 기원전 587년까지 멸망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부터 기원전 571년경까지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사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본다면 1-39장이 심판 선고이고 40-66장이 구원 선포입니다. 1-39장은 기원전 8세기, 유배 이전이니 다른 유배 전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는 심판을 선고합니다.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1,1)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심판 선고입니다. 그러다가 유배 중에 작성된 이사 40,1에서는 “위로하여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출발점으로 하여 어조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위로하여라” 하셨으니 예언자는 백성을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심판이 다 이루어졌으니 위로의 때가 왔음을 알리라는 것이 40장 이후의 내용입니다.

 

 

심판 선고에서 구원 약속으로

 

예언자들은 남들이 태평하다고 할 때에는 멸망을 예고하고, 남들이 이제 다 망했다고 주저앉아 있을 때에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마치 청개구리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심판 선고가 갑자기 구원 약속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구약의 예언서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그렇기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심판을 선고할 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배 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살다가는 망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살기에, 즉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심판을 선고합니다. 멸망의 원인은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과연 멸망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더는 심판을 선고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선포 내용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선포해야 할까요? 회개하라고 외쳐 볼까요?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유배 전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멸망을 통해서 자신들이 예언자들의 설교를 듣고 회개할 능력조차 없었음을 깨닫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파산했습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고 우리의 구원을 보증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이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예언자가 선포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입니다. 멸망의 원인은 이스라엘에 있었지만, 구원의 원인은 이스라엘에 있을 수 없습니다(이 말은 앞으로 무수히 듣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된다고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철저한 실패를 겪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예언자들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들인 것과 같이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손을 놓지 않으셨고 아직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그래서 구해주신다고 선포합니다.

 

 

멸망을 통한 구원

 

예언자들의 선포 내용을 보면, 예언서들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는 ‘멸망을 통한 구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전 적당한 시점에서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길을 돌이켜 멸망을 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예언자들도 고생을 많이 했고, 이스라엘도 고생을 많이 했고, 하느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러지 않을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늘 돌아온 아들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방탕한 생활에 빠지지 않고 재산을 날리지 않았다면, 아들도 아버지도 고생을 덜 했겠지요. 하지만 그랬더라면 그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작은아들도 ‘파산’을 겪었고, 이 체험을 통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서도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서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어 유배 전, 유배 중, 유배 후의 예언을 다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1부(1-39장)에서 선포되는 심판은 구원을 향한 역사의 한 단계가 됩니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이사 1,1)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었지만, 그 멸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더 작은 범위 안에서 살펴본다면, 이사 1,2-2,5에서도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장의 심판 선고가 최후가 아님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아니라 “충실하던 도성”(1,21)의 본모습을 되찾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멸망을 통한 구원. 어쩌면 달갑지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무상의 사랑은 내가 가장 가난해지는 순간에 가장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떨어지고 좌절을 겪는 순간이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이 됩니다. 그 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예언자들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줍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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