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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위로하여라(40,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8,804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위로하여라”(40,1)

 

 

어지러운 세상, 미래 없이 살아가는 많은 이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무슨 말로 위로하시겠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이라고 떠들고 다니면, 그 사람들이 들어는 주겠습니까?

 

 

“위로하여라”(40,1)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40,1).

 

이사야서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는 부분입니다. 1-39장이 대체로 유배 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위로’가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 곧 40-55장은 ‘위로의 책’이라고 할 만큼 자주 하느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이렇게 ‘위로’를 말하게 된 데에는 물론 국제 정세의 변화가 큰 역할을 합니다. 바빌론은 페르시아 앞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유배 간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압제자들이 멸망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조금씩 밝아 옵니다.

 

하느님께서 키루스에 대해 “그는 나의 목자”(44,28)라고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당신께서 오른 손을 붙잡아 주신 키루스에게 말씀하시니”(45,1)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페르시아 임금에게 이런 호칭들을 사용한다는 것이 상당히 낯설게 보입니다. 하지만 유배 중의 이스라엘이 키루스를 이렇게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바빌론과는 달랐습니다. 일단 종교적인 면에서, 페르시아인들이 신봉하던 조로아스터교는 다른 종교에 관용적인 편이었습니다. 바빌론은 여러 민족을 정복하면서 그들의 신전을 파괴하고 신상들을 바빌론으로 가져갔지만, 키루스는 그 약탈물들을 돌려주었습니다. 신상들을 다시 자기 나라로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역대기와 에즈라기에 언급된 ‘키루스 칙령’은 이러한 관용을 배경으로 합니다. 키루스가 유다인들에게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도록 허락한 것이지요(2역대 36,22-23; 에즈 1,1-4).

 

키루스가 마음이 너그러운 인물이라 다른 민족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만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계산도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행정적인 면에서, 수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제국을 강력한 중앙 권력으로 통제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의 권한을 부여해 주고 각 민족의 제도와 종교를 존중해 주면서 페르시아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 비용도 덜 들고 힘도 덜 들어 더 편안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정책 덕분에 바빌론에 정복당했던 여러 민족에게 키루스는 해방자였고, 유배중이던 이스라엘에게도 키루스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목자였습니다. 키루스의 등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를 선포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40,3)

 

이렇게 상황이 바뀌어 갈 때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40,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이미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다윗 왕조가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질 때, 이스라엘은 자신이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카 15장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더 이상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가 목을 끌어안고 잔치를 준비하듯이, 하느님도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위로를 전하고자 하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다정히”(40,2) - 자구적으로 번역하면 ‘예루살렘의 마음에’ - 건네시는 그 위로의 내용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는 ‘귀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등을 돌린 죄의 결과였던(“죗값” 40,2) 50년의 유배 기간이 이제 거의 끝나 가고, 백성은 이제 유배지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기 위한 준비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40,3) 닦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모세 시대에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이 그곳을 떠나 광야를 거쳐 약속된 땅으로 들어갔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끄셨던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다시 한 번 광야에서 당신 백성을 이끄실 것입니다. 거친 땅, 황폐한 땅에서 당신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다 죽은 것 같은 이스라엘을 살려 내심으로써 모든 민족 앞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떨치실 것입니다.

 

 

“외쳐라”(40,6)

 

이만하면 상당히 기쁜 소식 같지요.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예언자의 대답,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40,6)라는 말은, 도대체 이 상황에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하시느냐는 뜻입니다.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에 지친 백성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유배 전 예언자들이 ‘심판’을 선고할 때 사람들은 그 말을 듣기 싫어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모스가 심판을 선포할 때 아마츠야는 임금에게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아모 7,10)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선포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즉시 기뻐하며 환영하고 그 말씀을 믿는 것도 전혀 아닙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가 쉽습니까? 치유될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위로하기가 쉽습니까? 그 환자가 가난하기까지 하다면, 무슨 말로 그 가족을 위로할 수 있습니까? 취직 전부터 빚만 잔뜩 지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약속할 수 있습니까? 예언자는,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외쳐야” 할 것인지 하느님께 되묻습니다. 위로를 전하면, 그들은 들을까요? 그 위로의 말씀은 과연 이루어질까요?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40,8)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40,6). 세력을 떨쳤던 바빌론도, 예언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이스라엘도 모두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습니다. 그 누구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보이는 하느님의 약속, 빈말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 그 말씀이야말로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이 다가올 때 예레미야는 심판을 선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예레미야 자신도 그 말씀의 실현이 지체되자 믿음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첫 장에서 하느님은 “사실 나는 내 말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다”(예레 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받던 요시야 통치 십삼 년(예레 1,2), 곧 기원전 627년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하느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기원전 587년까지 사십 년 동안 지켜보고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그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제2이사야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이제 “복역 기간”(40,2)이 끝났다고,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백성은 위로의 말씀도 믿기 어려워할 것이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예언자에게도 그 말씀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을 선고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다름없이, 그도 불신과 거부를 겪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히브 4,12).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해도 하느님은 당신 구원의 약속을 반드시 실현하십니다.

 

심판을 선고하는 것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영원할 것이라고.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의 지혜》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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