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 성취 인용문 지난 호에서 다룬 마태오 복음의 대표적인 특징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분으로 설정한 데 있다. 물론 다른 복음서에도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복음서 작가 마태오가 이 주제를 집요하게 발전시켜 나간 것을 보면 이에 대해 든든한 확신을 가졌던 게 아닌가 싶다. 이제 그 확신을 추적해 보자. 누군가 마태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까? ‘도대체 예수가 이스라엘 전통을 온전히 대변하는 분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바오로의 말에 따르면 이스라엘 전통의 집산물인 율법이 예수님을 믿는 데 오히려 방해된다는대요?’, ‘이스라엘 율법의 수호자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던가요?’ 그러면 마태오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5,17 참조). 제발 딴 소리 마세요! 바오로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설정하는 대표적인 논리 중에 하나인 이른바 ‘성취 인용문’은 모두 15번 나온다(1,22-23; 2,5-6; 2,15; 2,17-18; 2,23; 3,3; 4,14-16; 8,17; 12,17-21; 13,14-15; 13,35; 21,4-5; 24,15; 26,56; 27,9-10). 그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게 주로 ‘예언자 ∼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구절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그는 말씀하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22-23; 참조 이사 7,14). 이 구절에는 동정녀 탄생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저자의 뚜렷한 편집 의도가 있다. 세상을 구할 위대한 영웅이 태어나는데 어찌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과정을 밟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마태오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굳게 믿었고 구약성경에서 그에 적합한 구절을 찾기 원했을 것이다. 마침내 이사 7,14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뒷받침할 만한 예언을 발견하고 자신의 복음서에 싣는다. ‘성취 인용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마태오는 율법 학자?! 유다교 율법 교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필수 과목은 세 가지다. 첫째 구약성경(정확히는 율법과 예언서), 둘째 그 해석인 ‘조상의 전통, 셋째 수사학이다. ‘성취 인용문’이 15번이나 나온다는 것은 마태오가 율법 학자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 변변한 책도 없이 기억력에 의존해 구약성경을 꿰고 있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 구절을 기억해 내어 적절한 상황에 적용하고, 그것을 문학 양식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상당한 실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13,52)는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오 자신을 넌지시 암시한 것으로, 그가 율법 학자 출신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언행은 출애굽의 위대한 영웅인 모세의 재현처럼 보인다. 예수님 탄생 즈음에 아기들의 대학살이 있었고(2,16-18), 어린 예수님은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 갔다가 유다 땅으로 귀환한다(2,13-15.19-23 참조).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초월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면 종종 산에 오르시는데(5,1; 15,29; 17,1; 24,3; 28,16 참조), 이 역시 출애굽 시절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처럼 구약성경에서 ‘산’이란 계시의 장소였다. 또 마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모아 총 다섯 개의 ‘설교 집성문’으로 만드는데 곧 산상 설교(5-7장), 파견 설교(10장), 비유 설교(13장), 교회 설교(18장), 심판 설교(24-25장)이다. 이 역시 구약성경의 ‘오경’을 본뜬 것이다. 이 정도면 마태오 복음은 철저히 구약성경에 근거해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족보와 ‘성취 인용문’은 마태오가 가장 정성을 들여 만든 편집 작업이라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마태 1,22-23으로 돌아가 보자. 동정녀 잉태 예언과 예수님의 탄생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동정녀 잉태로 세상에 오실 예언자를 예견했고, 마침 요셉과 동침하지 않은 채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났으니(1,25) 앞뒤가 착착 들어맞는 설정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확실하게 성취된 셈이다. ‘하느님(엘)께서’ ‘우리와(아누)’ ‘함께(임)’라는 복합 이름 곧 ‘임마누엘’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일생을 함께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녀’라는 번역에 대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한글 성경에서 ‘처녀’ 또는 ‘동정녀’라 번역된 히브리어 ‘알마’는 원래 ‘젊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알마’ 자체는 이미 결혼을 했거나 적령기에 이른 ‘젊은 여인’으로, 잉태한 적이 없는 여인을 가리키는 ‘동정녀’와 직결되진 않는다. 사실 신약성경을 둘러싼 세계에도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신화가 많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의 장난에 따라 아비 없이 아기를 낳은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태어난 이들은 대체로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영웅 대접을 받는데 그중 헤라클레스가 대표적이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에게도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따라다니는데,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역시 동정녀에게서 낳았다고 전해진다. 말하자면 고대 지중해권 세계에서 동정녀 탄생이란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표시로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뜻이다. ‘성취 인용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구절이 아니라 복음서 작가의 편집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주변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던 동정녀 탄생 신화를 언급했고, 성취 인용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오차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몹시 불편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가르침의 근거가 흔들리면서 겪는 일시적 혼란일 수도 있고 동정녀 탄생에 신앙의 생사를 걸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하느님의 역사를 과소평가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 우주를 통괄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어찌 그리 쉽게 흔들릴 수 있겠는가. 어느 날인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와 아내를 버릴 때 이혼장을 써 주는 게 옳은지 물어보았다. 이스라엘에서 관행으로 자리 잡은 신명 24,1의 내용을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19,8). 이 규정은 모세의 가필이지 원래부터 율법에 있었던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비판하신 예수님의 눈썰미가 여간 예리하지 않다. 편집 비평 같은 방법을 통해 역사를 큼직하게 재단하시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도 마태오의 의중을 신중하게 파악하시길 바란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박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