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 마태오 교회의 직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이 말을 들은지 꽤 오래됐다. 50년은 훌쩍 넘었으려나? 아무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개념은 내 머릿속에 이 간단한 대구법문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마태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23,8-10). 참으로 속이 후련한 말씀이다. 모두가 형제자매니 서로를 스승이라고도, 아버지라고도, 선생이라고도 불러선 안 된다는 뜻 아닌가! 이 같은 마태오 복음의 ‘호칭론’에 따르면 당장 신부(神父)와 교리교사(敎理敎師)부터 걸리게끔 되어 있다. 거기다가 교부, 교회박사, 몬시뇰, 아빠스, 주교, 대주교, 교황 등등으로 확대하면 가톨릭교회는 가히 호칭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호칭들 하나하나가 공동체 내의 평등은 고사하고 계급의식을 적극 장려하진 않나 의심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주교 착좌식 때 휘황찬란한 조명이 드리워진 제단에 화려한 복장을 한 신임 주교를 요란한 의자에 앉혀 놓고서는 선배 주교가 ‘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로 교우들을 섬기는 종이 되라’는 권면을 하는 것을 보면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한 마태오 교회의 직제 스승, 아버지, 선생 등 평등을 해치는 호칭을 없앴다면 마태오의 공동체에는 직제마저도 아예 없었다는 뜻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마태오는 자신을 하늘나라의 ‘율법 학자’(13,52; 23,34)로 인식했고 예언자(23,34), 또는 현인(소포스: 23,34)이라는 직분으로도 소개한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23,34). 예수님을 이스라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 한 마태오의 사관(史觀)을 이유로, 학계에서는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너희 회당’(23,34)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인 공동체인 ‘회당(시나고게)’과 자신을 별개의 조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마태오 복음에 두 번 등장하는 ‘교회’(에클레시아: 16,18; 18,17)라는 용어는 이미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태오 교회는 ‘예언자’, ‘현인’, ‘율법 학자’ 등의 직분을 유다교에서 그대로 빌려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교 ‘회당’과 구별해 자신을 ‘교회’라 불렀지만,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유다인이었다. 둘째,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유다교의 직제를 수용했다. 셋째, 그러나 유다교 식의 권위적인 계급의식까지 따라오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두 손, 두 발을 걷어붙이고 교회를 이끌 일꾼이 필요했으나 그가 교회 내에서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기는 원치 않았던 것이다. 평등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모인 ‘교회’ 마태오는 교회에 관심이 유난히 많았다. 교회에 관한 지침들을 모아 18장(교회 설교)에 집중적으로 담았고, 자신의 교회 직분이었을 법한 ‘율법 학자’, ‘현인’, ‘예언자’에 대해 언급(23,34)했고, 만에 하나라도 직분을 맡은 이들이 교만해질세라 그들을 단속하는 경고도 종종 언급한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23,11-12). 마태오 복음에서 제시하는 ‘교회’란 옛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 이스라엘’이다. 유다인이라는 민족적인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신앙적인 기준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구성된다는 뜻이다. 기존의 제도권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니 일정한 직제와 그에 맞는 직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에게 직분이란 동료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믿음을 북돋우는 데 필요할 뿐이다. 곧 직제의 참뜻은 그 기능에 있지 권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오는 교회 내의 누구라도 스승, 아버지, 선생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누구도 억눌리지 않는, 평등한 하느님의 백성. 그것이 바로 마태오 복음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의도였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고 그때부터 교회는 급속도로 제도화의 길을 걸었다. 거대 조직이 생겼고, 조직을 꾸려 나가기 위해 수많은 아버지(?)와 스승과 교회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직분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쩔 수 없이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님은 온갖 불의와 억압에서 우리를 구해 냈으며,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를 원했다. 구별은 있으나 차별은 없는 곳, 하는 일은 각각 달라도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의인과 죄인의 기준을 만들어 구원의 우선 순위를 정해 놓지 않은 곳. 역사의 예수님이 의도한 ‘평등’은 1세기 교회의 꿈이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가르침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교회를 두고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자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5,13-16 참조)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결코 실현되지 못할 이상적인 대안(代案) 사회로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의 원뜻을 이렇게 정의할 때 오늘날 교회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필자의 판단으로는 지극히 정상이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박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