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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태오 복음서: 행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존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459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행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존재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마태오 복음은 행동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겨 마땅하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7,12)라는 말씀이 산상설교의 결론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더불어 다음 구절 역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7,24). 행동을 통해 더 큰 차원의 진리를 습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들어 낯선 이와 처음 만날 기회가 생기면 사전 조사를 해두는 일이 잦아졌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면 대화가 한결 부드러워지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여성이자 미국 성공회 여덟 개 관구장 모임의 의장주교이며 과거에 오징어와 문어를 연구했던 해양생물학자. 이는 수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캐서린 제퍼츠 쇼리 주교(Katharine Jefferts Schori, 1954-: 성공회에는 여성 사제는 물론 여성 주교도 있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간단한 정보다. 통역을 맡은 인연으로 쇼리 주교를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처음엔 다소 어색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내가 가진 그에 대한 정보들이 선입견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에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쇼리 주교는 해양생물학자의 모습도 아니었고 남성/여성이라는 성性 구별에 초연했으며 고집스러운 자기주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세계 성공회의 역사와 전통을 폭넓게 보는 대범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는 의장주교로서 자신의 역할에 전념했던 것이다. 미국 성공회 전체를 대표하는 주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얄팍한 선입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행동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보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실천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행동이 단지 당신 말씀에 효력을 가져오기 위한 기능적 역할에 머무른다고 하면, 이는 분명 지나친 과소평가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른바 ‘구원 선포’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대목은 마태오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전승으로 물려받은 것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마태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만 나오는 낱말이 6개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쉼, 안식’(아나파우시스)이라는 주제가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너희 영혼이 쉴 곳을 찾아라”(예레 6,16)는 구절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이 대목이 마태오 이전에 형성된 전승임을 알려 주는 증거다. 즉, 예수님 자신에게 이 말씀이 소급될 수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마태오가 예수님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이곳에 배치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이 대목이 필요했을까?

 

이 말씀을 둘러싼 상황은 바리사이가 강조하는 율법 규정의 무게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변두리 사람들의 고통이었다. 예수님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그들에게 ‘쉼’을 약속하신다. 이렇게 자신의 짐을 예수님에게 맡겨 놓고 쉬라는 가르침은 구원의 현재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저 예수님에게 삶의 온갖 걱정거리를 넘겨 드리기만 하면, 나는 그간 짊어졌던 고통에서 자유로워져 안식을 맛보게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강조되어야 할 전제 사항은 바로 예수님이, 언행일치의 화신化身으로서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이 선포한 윤리적 자세의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없는 평안을 준다. 비록 내가 사막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렵지 않으니 이는 주님의 지팡이가 나를 지켜 주기 때문이며, 주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어둠을 비춰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바짓가랑이만 붙들고 있으면 좋은 수가 생긴다. 틀림이 없다.

 

정체성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부터 온다예수님은 “(바리사이가)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라고 이르셨다. 이 말씀이 우리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인도한다. 말에 맞는 행동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바꾸어 보자. 학생증만 있다고 학생인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학생이지! 목에 로만 칼라만 두르면 다 사제인가? 사목을 제대로 해야 사제이지! 마찬가지로 행동하지 않는 바리사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더는 지킬 수 없다.

 

바오로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다.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교회를 세워 준 바오로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에서 추천장을 받아온, 겉만 번지르르한 사도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2코린 3,1). 바오로는 그런 코린토 교회에 일침을 가한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도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 사도직의 증표입니다”(1코린 9,2). 진정한 사도는 실무에서 판가름이 난다. 코린토 교회의 실제 개척자인 바오로는 권위형 사도가 아니라 실무형 사도이다.

 

주체 이론의 대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정체성을 ‘수행’과 연결한 바 있다. 그녀는 ‘사람이란 되는(is) 것이 아니라 행하는(do)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앞에 언급한 쇼리 주교가 그 좋은 예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 1906-1945)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가능성 속에 떠 있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과감하게 붙잡아라. 사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행동에서만 자유가 있다. 초조한 조바심에서 벗어나 역사의 폭풍 안으로 들어가라. 오직 하느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에만 의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법이다. 이쯤에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우리 구미에 맞게 슬쩍 바꿔 보자.

 

‘나는 행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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