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하느님도 살고 사람도 살고 : 의로움과 사랑 이달에는 마태오 복음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를 하나 풀어보려 한다. 마태오 복음의 전반적인 기조가 이스라엘 전통과의 연속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이제까지 수차례 강조했다. 물론 이는 사제들이 장악한 제사 중심의 제도권 유다교나 율법 해석으로 정평이 난 라삐 중심의 유다교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전통’이다. 다시 말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기성 유다교와 구별되면서도 여전히 유구한 이스라엘 전통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이중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율법 대신 믿음’이라는 논리로 기성 유다교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마태오의 경우, 바오로처럼 분명한 선을 긋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마태오 자신도 유다인이었을 뿐 아니라 마태오가 속한 공동체 구성원의 대부분이 유다인이었던 까닭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안식일이면 회당을 찾았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갔던 유다인이었다. 하나의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마태오는 율법 자체는 좋으나 율법이 운용되면서 의인/죄인의 차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태오는 율법을 무기 삼아 백성을 억압하는 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했고 그 책임을 묻는 심판 설교(23,1-25,46)에서 종교지도자들을 심하게 비판한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말이다. 그렇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고 나니 속은 시원하지만,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다음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36-40). 파스카 축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께 한 율법 교사가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데 묶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제시하며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이르신다. 당시는 경전의 범위를 ‘율법과 예언서’로 한정했기에 그리 대답하신 것이다. 여기서 “둘째도 이와 같다”가 특히 중요하다.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에는 없는, 여성형 인칭대명사 ‘아우테’(αυτη)를 첨가함으로써 두 계명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계명이라는 뜻이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 바로 하느님 사랑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믿음직한 보완 설명이 25,31-40에 나온다. 어느 의인이 종말의 날에 임금의 오른편에 서게 된다. 임금은 그에게 나라를 상속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25,35-36). 그러자 의인은 자기가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반문한다. 임금은 그때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느님이다. 그리고 우리가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한 일이 바로 하느님에게 한 일이라면 결국 그 형제가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유의 핵심은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이니 그를 하느님 대하듯 하라는 것이다. 물론 ‘작은 형제’라고 해서 예수님이 반드시 ‘못난이’를 거론했다고 보면 곤란하다. 오히려 못난이로 대변되는 모든 인간이라 해야 비유의 제맛이 살아날 것이다. 지난 6월호에 환경미화원을 도운 중년 남자 이야기를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 중년남의 이름이 박태식이었다지 아마? 아무튼 이웃에게 베푼 호의가 바로 하느님께 베푼 호의이고 이웃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임이 ‘최후의 심판’ 비유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점을 놓치지 않았고 간단한 편집 작업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이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람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다. 우리들의 잘못된 기대와 어리석은 희망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 섬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웅장한 성전을 세우면 하느님이 매우 기뻐하시리라는 기대를 품었고, 율법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따르면 하느님이 만족해하시리라 믿었고, 절기마다 양과 염소를 바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행위가 된다고 여겼다. 그러고는, 부활하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공로를 크게 보상해 주시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호통은 서릿발 같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23,33) 우리도 비슷하다. 최고의 건축가에게 성당 건축을 맡겨 ‘올해의 건축상’을 받으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여기고, 가톨릭 신자 수가 5백만이 넘고 교무금이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하느님이 쾌재를 부르실 것으로 기대하고, 오만 명이 동시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동양 최대의 성당을 백 년 계획으로 세우면 하느님이 매우 흡족해하시리라는 희망으로 모금에 열을 올린다. 그러면 하느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됐네, 이 곰 같은 사람들아, 이웃이나 제대로 챙기시게!’ 전 우주를 관할하시는 하느님 앞에 동양 최대 성당이 도대체 무슨 유치한 발상인가?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 의로움은 엄격하지만 사랑은 부드러워 언뜻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짝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대조 개념이 아니라 동일 개념이다.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면 그것으로 의로우신 하느님은 만족하신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게 열심을 쏟으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완성하는 길에 이른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섬기기에 골몰하느라 사람 사랑을 놓치고 말았다. ‘이웃 사랑’은 사람도 살고 하느님도 사는 유일한 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윈-윈(win-win) 전략인 셈이다. 이웃 사랑을 원수 사랑이라는 극적인 형태로 강조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역시 대립명제에 나오는 말씀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5,44-45).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8월호(통권 485호), 박태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