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지난 호에서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에 대해 설명했다. 하느님 나라는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온 기대를 걸고 살아 마땅하다. 온전히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면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몇 년 전에 자동차 브레이크를 고치러 간 적이 있었다. 정비사는 자동차 이곳저곳을 살펴보더니 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진단을 내렸다. 그저 닳아 빠진 앞 브레이크 라이닝만 교체하면 될 줄 알았는데 대공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라이닝은 바퀴 바깥쪽에서 브레이크를 잡아 주는 부품인데 반해 드럼이라는 부품은 바퀴 내부에서 잡아 주는 장치로, 그렇게 안팎에서 잡아 줘야 자동차가 멈출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당연히 나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정비사는 급기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바퀴 안쪽 드럼이 원형으로 점점 확장해 가고, 그렇게 확장해 바퀴 내부 안쪽 면에 드럼 판의 원이 완전히 달라붙어, 더 이상 채울 공간이 없어지면 그제야 차가 멈춘다. 말하자면 라이닝만 갈아서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기능을 다한 드럼 판까지 교체해야 안전한 운행이 가능한 셈이었다. 나는 정비사의 설명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냈다.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뿐 아니라 현재성을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려 놓고 곡식이 익으면 수확을 한다. 앞과 뒤는 그렇게 묶이는데 그 중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고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영그는 과정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밤과 낮과 계절의 변화와 태양 빛과 땅의 영양소와 적절한 양의 비가 있어야 씨가 자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 나라란 마치 겨자씨 한 알처럼 작지만 매 순간 땅속에서 꾸준히 자라는 것이며(4,30-32), 시간이 지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야 주인이 돌아오고(13,33-37), 좋은 땅에든 나쁜 땅에든 씨를 뿌리는 작업이 지금, 현재 진행되어야 미래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4,1-20). 그처럼 하느님 나라는 비록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성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비유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 길게 걸쳐 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현재에 머무는 게 아니라 꾸준히 움직여 나가는 특성도 있다. 이는 씨가 하루하루 자란다거나, 밀가루 반죽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이미지를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즉,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이란 한곳에 멈추어 선 시간대가 아니라 움직이는 현재, 혹은 자라나는 현재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그에 반해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은 장래에 닥쳐올 특정 시점을 가리킨다. 그날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밭의 주인은 추수 때가 된 줄 알고 곧 낫을 댈 것이며, 겨자씨는 어느덧 큰 가지를 뻗을 만큼 자라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정도가 된다.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의 미래는 현재가 이어지고 이어져 그 축적된 힘으로 실현되는 미래이다. 요약하면, 하느님 나라는 현재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으며 이런 움직임이 성장으로 이어져 더 이상 커 나갈 여지가 없을 때,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꽉 차는 때에 바야흐로 그 완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당연히 인간의 시간관념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시간대, 즉 역사의 끝에 다다른다. 다만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과 관련해 한 가지 명심해 둘 점은, 현재 일어나는 시대의 징조를 보아 그때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13,28-29) 특정한 시간을 미리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은 그 현재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자동차 정비사는 기계치인 나에게 브레이크와 드럼의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하면 드럼이 원형으로 넓어지고 마침내 차가 멈춘다. 하느님 나라도 그와 같다. 예수님의 언행을 좇아 하느님 나라를 지금 시작하면 그 축적된 힘으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가져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에 머물면 나는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 나라에 있는 셈이니, 하느님이 배타적으로 다스리는 영역이 꼭 역사의 종말 넘어 그 어디인가에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온 우주가 하느님의 창조물이자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정신이 박힌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켜 마땅하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한 대로다. 만일 브뤼헬의 그림 [게으름뱅이들의 천국]처럼, 푸른 풀밭에 대자로 누워 맘껏 먹고, 주변에는 포크를 꽂은 돼지가 돌아다니는 ‘천당’을 기대했다면, 그래서 살아생전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게을렀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매우 잘못 이해한 결과다. 그런 자들은 추수 날 쭉정이처럼 처형불에 던져지리라.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 앞에서 절대 비겁해져서는 안 된다. 상위 1%가 나머지 99%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불의한 곳에 정의를, 무기 경쟁으로 온 나라를 망치려는 집권자들의 폭력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고, 국민을 속이고 나라를 좀먹는 부정부패에 용기 있게 도전하고, 어른들의 무관심과 책임 회피로 여전히 바다에 수장되어 있는 어린 생명의 숨통을 틔워 주어야 한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서 이 땅에 뿌리내려 숨쉬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가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읽어 냈다.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가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니 형제들이여, 그중에서도 특히 스스로 신앙의 우등생임을 과시하며 세상을 철저히 외면하는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느님 나라가 오소서”라고 간청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귓전으로 흘리는 겁니까?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4월호(통권 493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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