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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서: 여기서 꺼져라! 사탄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226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여기서 꺼져라! 사탄아

 

 

만일 남미 저 시골구석에 사는 어떤 노인이 물 위를 걸었다는 해외뉴스를 접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선 무엇인가 속임수가 있는지 궁금해할 테고 만일 사실이라면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지 연구할 것이다. 그러면 소금쟁이처럼 표면장력을 이용한다거나 바실리스크 도마뱀처럼 한발 빠지기 전에 다른 발을 신속하게 옮기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오늘날에는 기적이라는 게 다 그 모양이다. 유행어처럼 ‘아니면 말고’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남미의 어느 해방 신학자가 주장했듯 각자 꽁꽁 숨겨 둔 음식을 다 내놓아 나눠 먹었더니 5천 명이 넉넉히 배를 채우고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고 하는 것도 맘에 와닿지 않는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인간의 이기심을 버린 게 진짜 기적이라는 인간 심리에 의존한 설명인데, 교회의 공식 가르침에 따르면 딴 주소에서나 가능한 소리다. 교회는 실제 초자연적 현상만 기적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기적의 원주소는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예수님에게 있다.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곳곳에서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네 복음서에 보도된 것만 해도 수십 가지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적이 다 똑같은 기적은 아니다. 기적마다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일일이 따로 분류를 해 주어야 전체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씩 살펴보기 전에 종류부터 개괄해 보면, 치유 기적, 구마 기적, 자연 기적, 음식 기적, 소생 기적, 구원 기적 등이 있다.

 

우선 예수님은 누구든 육체적인 고통에 빠져 있는 이를 볼 때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언제부터 불행을 겪게 되었는지, 그리고 치유받아 건강이 회복되는 과정까지 자세하게 점검했다. 그래서 들것에 실려서야 겨우 움직이는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고(2,1-12), 눈 먼 이에게 손을 얹은 후 무엇이 좀 보이는지 확인했다(8,22-26). 하지만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도 단지 한 사람만 감사를 표하러 왔을 뿐이다(루카 17,11-19). 치유 기적의 동기가 오로지 예수님의 연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증명해 주는 보도다.

 

길을 가던 예수님 앞에 더러운 영이 들린 이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예수님은 더러운 영과 통성명하고(5,9-10), 사람에게서 내쫓아(1,21-26) 결국 파멸시켰다(5,11-13). 이는 예수님이 더러운 영으로 대변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는 막강한 권한을 하느님에게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1,27-28).

 

예수님은 종종 자연물을 대상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했다. 무화과나무를 단숨에 말라죽게 하였고(11,12-14.20-21), 몰아치던 풍랑을 꾸짖어 갈릴래아 호수를 평온하게 만들었으며(4,35-41), 마치 평지를 걷듯 수면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왔다(6,45-50).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한 어떤 기적보다도 자연 기적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 같다. 사실 자연은 하느님의 창조물로 그분의 고유 영역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풍랑과 중력과 생명 등 창조 세계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으니 하느님에 버금가는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쫓아 나선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래서 예수님께 민생고를 좀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모양인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런 일이 두 번 있었다고 전한다(6,30-44; 8,1-9). 이때도 그 답답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반문한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6,37) 하지만 예수님은 군중을 목자 없는 양처럼 가엾게 여겨 빵을 먹였다고 하는데(6,34) 여기 쓰인 동사가 ‘스플랑크니조마이’, 곧 ‘불쌍히 여기다’이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전문용어(technical term)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가진 분이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6,34).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려 냈다(5,21-43). 어느 날인가 회당장 야이로가 다 죽게 된 딸을 살려 달라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야이로를 앞장세워 그의 집으로 향하던 예수님 앞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인이 나타났고 시간이 지체되어 그만 딸은 죽고 말았다. 이때 사람들이 와 이미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께서 굳이 집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야이로는 매우 섭섭했을 것이다. 조금만 서둘렀으면 딸이 살았을텐데…. 하지만 죽음도 예수님의 의지를 막아 내진 못했으니, 야이로의 딸은 살아났고, 이 논리는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까지 이어진다. 즉 ‘소생 기적’은 예수님 부활의 암시이다.

 

마지막으로 ‘구원 기적’을 보자. 제자들은 한밤중에 역풍에 휩싸여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었고(6,45-52), 거센 바람이 불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 놓여 떨었다(4,35-41). 또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병든 딸을 위해 예수님의 식사 자리에 염치 불고하고 뛰어들었다(7,24-30). 그러자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고, 물 위를 걸어와 제자들을 구해 주었으며, 구원 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던 이방 여인의 절박함을 풀어 주었다. 예수님을 모시면 어떤 위험에 빠진 사람이라도 구원받으며 여기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

 

이제까지 여섯 종류의 ‘기적 사화’를 살펴보았고 하나하나마다 의도가 들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원래 ‘기적 사화’의 특징은 인간의 행적 중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야기로 꾸민 데 있다. 그리고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의 기적 사화들은 아예 구성 면에서 공통점이 눈에 띈다. 상황 묘사, 예수님이 행한 기적, 기적이 진짜였음을 증명하는 기적의 실증 등 세 단계 구성이다. 여기에 목격자의 반응이 더해지거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적 사화를 끝맺는 경우도 있지만, 기적 사화의 기본 틀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마르코 복음의 기적 사화에서는 뚜렷한 역사의식, 곧 ‘신앙’이 발견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여 주려는 목적으로 기적 사화를 사용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의 기적 보도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였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과학 지식이 부족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기적이란 오히려 자연스러운 세상 이치라서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 관점은 문명이 발달할 대로 발달한 오늘의 시각과 큰 간격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는 기적의 규모보다 그 기적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의 내용이 매우 중요했다. 마르코에게 예수님의 기적은 그분이 하느님의 전권(全權)을 부여받은 분으로서 악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었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0월호(통권 499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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