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3) 나를 마라라고 부르셔요(룻 1,20)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1,20). ‘나오미’라는 이름은 ‘나의 감미로움’을, ‘마라’는 ‘쓰라리게 하다’를 뜻합니다. 1장에서 보여 주는 것은 바로 나오미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는 사건들입니다. 나오미 – 마라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사람인 엘리멜렉이 기근 때문에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합니다. 기막힌 상황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압은 이스라엘이 상종하지 말아야 할 민족이었습니다(신명 23,4-5 참조). 그런데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으면 그런 모압 지방에 더부살이를 하러 갔을까요? 더 역설적인 것은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입니다. 히브리어로 ‘빵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이름대로라면 베들레헴에는 양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그런 베들레헴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 땅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이 모압 땅으로 가야 했다니…. 그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시도였습니다. 그나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모압 지방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부터 1장의 중심에 나오미가 서게 됩니다. 그 땅에서 10년쯤 지나는 사이 나오미의 두 아들 마흘론(‘질병’)과 킬욘(‘허약함’)도 세상을 떠납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과 두 아들도, 생명을 유지할 양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배고프고 힘든 타향살이 끝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나 아쉬움 없이 떠나갔는데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1,20-21). 이렇게 1장은 나오미가 점점 ‘빈손’(1,21)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나오미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오르파 나오미에게는 며느리가 둘 있습니다. 유다인인 마흘론과 킬욘이 모압 여자들과 결혼한 것은 율법에 어긋납니다. 특히나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에, 느헤미야는 율법서에서 암몬인과 모압인은 하느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는 규정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서 이방인들을 분리했고, 이방 여자들과 혼인한 유다인들에게는 그 여자들을 내보내게 했습니다(느헤 13장 참조). 룻기는 벌써 느헤미야기와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나오미는 모압 며느리들에게 “각자 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거라”(1,8) 하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아들도 없는 과부입니다. 구약성경 특히 신명기계 법전에서 ‘고아, 과부, 외국인’은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지요. 가부장제와 부계 상속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는 과부에게는 안정된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앞날을 보장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나오미에게 다른 아들이라도 있었다면, 남편이 죽은 며느리는 남편의 동생에게서 후손을 얻을 수 있었지요. 나오미는 그나마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에게 사회적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저마다 새 남편 집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도록 배려해 주시기를 바란다”(1,9). 두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파와 룻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오르파’는 ‘목덜미’와 연관되어 시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간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오르파는 나오미의 말을 따라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룻기는 오르파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르파의 선택이 당연하고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에도, 모압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나 종교적 판단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며느리들의 미래였고, 나오미는 그들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룻 ‘룻’이라는 이름은 더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친구’라는 의미로 여겨졌지만, 근래에는 ‘충족시키다, 만족시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봅니다. 비와 눈이 땅을 적시고(이사 55,10 참조) 술잔에 술이 가득하듯이(시편 23,5 참조), 가득 채우고 생기를 되찾게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이름을 지닌 룻은 나오미 곁에 남기를 선택합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1,16). 바로 이어서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1,16)라는 구절이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 문제의 핵심은 룻의 개종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유다인 중심의 시각에서) 모압 여자인 며느리 룻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방인의 개종을 나타낸다고, 룻기의 주제가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룻을 개종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룻기가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려 했다면, 나오미는 룻에게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1,15)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오르파의 선택이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면, 그만큼 룻의 선택은 특별하다는 사실입니다. 룻의 행동은 기대치를 훌쩍 넘어서는 것입니다. 룻의 이러한 행동을 가리켜 보아즈는 ‘효성’(3,10)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효성’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이지요. 룻기 안에서도 3,10 외에는 ‘자애’로 번역됩니다. 이 ‘자애’와 관련하여 나오미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너희가 죽은 남편들과 나에게 해준 것처럼 주님께서 너희에게 자애를 베푸시기를 빈다”(1,8). 하느님의 자애가 룻기에서 그리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방금 인용한 1,8의 예만 봐도, 나오미는 하느님께서 며느리들에게 자애를 베푸시기를 기원하지만, 실제로 룻이 보아즈에게서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하고 지시하는 것은 시어머니 보아즈입니다. 이와 유사한 예를 룻기를 읽으면서 더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아즈는 룻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2,12) 피신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룻을 덮어 주는 것은 보아즈의 ‘옷자락’(3,9)입니다(히브리어에서 ‘날개’와 ‘옷자락’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룻기의 하느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룻기는 결국 사람들 사이의 덕행을 말하는 책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희에게 자애를 베푸시기를 빈다”(1,8)고 한 나오미의 말은, 그 후에 룻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드러나지 않는 하느님의 자애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미리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자애가 하느님의 복과 자애를 불러 온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1,8: “너희가 죽은 남편들과 나에게 해 준 것처럼”). 이렇게 해서 운을 떼었습니다. 이제부터 룻기가 끝나는 때까지 줄창 ‘헤세드’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모압 여자가 던지는 도전장이 바로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1장을 읽었습니다. 1장에서 나오미는 스스로 ‘빈손’이고, ‘나오미’(나의 감미로움)가 아닌 ‘마라’(쓰라린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나오미 곁에 모압 여자 룻이, 룻의 헤세드가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룻의 선택이었고, 안정된 미래나 새로운 가능성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시어머니 나오미 곁에 남기로 한 결단이었습니다. 룻이 오르파처럼 떠나갔다 한들 아무도 룻을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인 헤세드를 행합니다. 나오미 역시 과부로서 보호자가 없는 신세였고, 룻은 그런 나오미와 함께 있으려 합니다. 룻이 그와 함께 있었기에 나오미에게는 미래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오미를, 인간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 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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