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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4: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룻 2,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354 추천수0

모압 여인의 사랑과 도전, 룻기 (4)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룻 2,2)

 

 

생명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듯한 나오미가 계속 생명을 이을 수 있던 것은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의 곁에 머물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 역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약자입니다. 1장의 질문이 ‘나오미를 살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인가?’라면, 2장의 질문은 ‘룻을 살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인가?’가 될 것입니다.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2,2)

 

1장이 끝날 때 다음 장을 위한 예고편이 나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1,22). 보리 수확은 2장의 배경이 됩니다.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본래 구약의 율법에서는, 수확할 때 떨어진 이삭이나 포도 등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레위 19장에서는 이렇게 명합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너희 포도를 남김없이 따 들여서는 안 되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를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9-10). 주의 사항!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게르)’은 그 지역에 자기 땅을 소유하지 않아 남의 땅에 몸을 붙이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지, 국적상의 외국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종하지 않아야 할 인간인 모압 여자 룻에게는 이 율법이 적용되지 않고, 룻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세대주도 없고 주민등록도 없고 건강보험도 없는, 오늘날의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 같은 처지입니다.

 

그래서 룻은 누군가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2,2)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보아즈가 룻에게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물을 마시라고 할 때에도 룻은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2,10)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이방인(노크르야)’은 레위 19장의 ‘이방인’과 달리 국적상 외국인을 지칭합니다. 룻은 외국인으로서 기대할 수 없는 호의를 입어 이삭을 줍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연히”(2,3)

 

이삭을 주우러 간 룻은 ‘우연히’(2,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즈의 밭에 가게 됩니다. 우연히! 국어사전에서 ‘우연’을 찾으니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라네요.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님을 압니다. 지난달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나오미가 이미 며느리들에게 “너희가 죽은 남편들과 나에게 해준 것처럼 주님께서 너희에게 자애(헤세드)를 베푸시기를 빈다”(1,8)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룻은 나오미에게 ‘효성’(3,10)을, 헤세드를 보였습니다. 나오미가 살 수 있도록 자기 겨레와 어머니 집을 떠나 (아브라함이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났던 것처럼!) 나오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런 룻에게 이제 하느님의 자애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룻기는 하느님께서 숨어서 움직이시는 책이라, 여기에서는 나오미의 말과 같은 축복과 기원을 특별히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기원이 실현되면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룻기의 저자가 정말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다고 여겼다면 그런 축복을 적어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2장에서만 한번 볼까요? 보아즈는 룻에게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2,12)라고 말합니다. 과연 룻은 그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즈에 대하여 룻에게, “너를 생각해 준 이는 복을 받을 것이다”(2,19)라고 말합니다(20절도 참조). 찾아보니 축복이 많지요? 이것이 룻기 저자의 표현 방법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듯 보이는 사건이 사실 하느님의 자애로 이루어졌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너를 생각해 준 이”(2,19)

 

보아즈는 모압 여인인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 아니라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 주고, 끼니때에는 배불리 먹고 남길 만큼 음식을 줍니다. 그의 종들에게 이삭을 흘려 주라고 말하고,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둡니다. 그렇게 룻은 하루에 보리 한 에파를 주웠습니다. 한 에파는 40리터입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나오미가 그 보리의 양을 보고 이것이 단순히 보리 이삭을 주워 모은 것이 아님을 즉시 알아챘으리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보아즈가 룻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룻이 자기 친척인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며느리이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의무를 다한 것일 뿐, 룻을 특출하게 여긴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설령 그렇다 해도 당시 유다 사회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보아즈의 행동은 뜻밖입니다.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에 이방인과 혼인한 유다인은 율법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민족의 정체성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이미 가족이 되었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즈는 룻이 모압 여자라고 해서 내치지 않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당시의 유다인이라면 그런 보아즈를 질책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호의에 룻이 “어찌 된 영문입니까?”(2,10) 하고 보아즈에게 묻자, 보아즈는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2,11)을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베푼 호의에 보아즈가 보답하여 룻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2,12).

 

 

“자애”(2,20)

 

보아즈의 축복, 이어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자애. 과연 하느님의 자애일까요, 보아즈의 자애일까요? 2장에는 문법상 애매한 문장이 있습니다. “그분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에 대한 당신의 자애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 복을 받을 것이다”(2,20)라는 나오미의 말입니다. 이 번역에서 산 이들과 죽은 이들에 대한 자애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에 대한 자애를 저버리지 않는 그분은 주님께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산 이들(나오미와 룻)과 죽은 이(엘리멜렉)에 대한 자애를 저버리지 않는 보아즈가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는 말이 되지요.

 

이 문장의 애매함은 어쩌면 룻기의 애매함을 대변합니다. 바로 그 애매함에 룻기의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자애가 눈에 보이는 인간의 자애로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1장부터 시작해 봅시다. 나오미를 살 수 있게 한 것은 룻의 헤세드였습니다. 이제 2장에서 룻을 살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네, 보아즈의 너그러움입니다. 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룻을 율법에서 정해진 것 이상으로 배려한 보아즈의 호의는 글자 그대로 룻과 나오미를 ‘살 수 있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과부인 그들은 보아즈 덕분에 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그런 모양입니다.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베푸는 이들 덕분에 내가 살아갑니다. 그들은 나에게 하느님의 자애를 보여 줍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애를 베푸는 이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심을 봅니다.

 

“고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그들의 어머니에게 남편 노릇을 해 주어라. 그러면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되고 그분께서 네 어머니보다 더 너를 사랑해 주시리라”(집회 4,10).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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