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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베드로의 둘째 서간 (3) 올바른 앎의 열매, 온전함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837 추천수0

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베드로의 둘째 서간 (3) 올바른 앎의 열매, 온전함

 

 

베드로의 둘째 서간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은총에서 시작하여 그릇된 앎의 앙화를 거쳐 올바른 앎의 열매인 구원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분명하고도 종말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이 서간은 종말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준비를 앎과 연결시켜 가르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불완전한 지식은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조롱하게 만든다.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3,4) 차라리 그들이 그리스도를 몰랐더라면 그분의 재림을 조롱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릇되게 알면서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오만에서 조롱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의 징조와 시간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 하느님의 시간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지함을 간과하고 있다. 이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상기시킨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3,8).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품고 계시는 하느님의 시간을 인간의 단위로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을 곧 일어날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에 재림의 지연은 심각한 의문과 당혹감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속으로 또는 겉으로 드러내어 이런 말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 하지 않으셨던가?”, “그분의 약속은 헛된 것일까?”, “정말 하느님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가?” 이러한 상황을 이 서간의 저자는 명쾌하게 정리한다. 지금 우리들의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재림 사이의 시간은 하느님 자비의 시간이다(3,9).

 

지연되는 재림은 주님의 무능이나 부재가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시간이다. 서간의 저자는 주님의 재림을 우습게 여기고 그 지연을 조롱하는 이들을 ‘무식한 이들’이라고 단언한다. 사실상 성경의 전통에서 무식함, 곧 알지 못함은 죄악과 재앙으로 이르는 관문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고서도 그들에게 땅을 상속해 주신 하느님을 알지 못할 때마다 죄악을 저질러 왔다(판관 2,10).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탄식을 들려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 1,3). 주님을 알지 못한 결과는 재앙과 황폐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 때문임을 예언자는 상기시킨다(이사 1,9).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토록 파국적인 사태를 초래하기에 서간의 저자는 오류에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주님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갈 것을 권고한다(3,18).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재림의 시기는 철저히 주님의 영역이지만, 그 재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기에 이 서간의 저자는 재림이라는 사건 자체보다는 재림 때 우리들의 준비된 자세에 관하여 강조한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3,14). 단 한 줄의 권고이지만, 이 가르침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티 없고 흠 없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탈출 12,5; 레위 1,3; 민수 6,14 등). 동시에 인간의 경우 윤리적 흠 없음으로도 사용된다(잠언 11,5). 따라서 티 없고 흠 없는 인간이란 올바른 삶을 영위함으로써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이 재림의 그날 누리게 될 시간은 무법한 자들이 누리는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서간의 저자는 재림의 순간을 굉음 및 불길과 더불어 갑자기 들이닥치는 파국적 혼란의 시간으로 묘사한다(3,10). 그러나 하느님께 속한 이들은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서게 되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세상의 원소들을 논해 온 무법한 자들에게 종말이란 그들이 신봉하던 원소들과 함께 소멸하는 파국의 시간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말 성경에 “나설 수 있도록”(3,14)으로 번역된 그리스말 원문은 “발견되어지도록”이라는 수동형이다. 누가 누구에게 발견된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눈에 그렇게 발견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재림을 흠 없는 상태로 맞이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의 흠 없는 상태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잘못을 범할 때마다 일일이 벌주지 않으셨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의 자비로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타인이 잘못할 때 역시 하느님께서는 그냥 넘어가신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의 부재라고 의심한다. 바늘귀보다 더 좁은 눈으로 하느님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며 살아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전히 나의,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이어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느님 자비의 증거이다. 하느님의 자비로 주어진 시간을 가벼이 여기지 말며, 진정 흠없는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도록 오늘의 삶을 살아갈 것을 베드로 둘째 편지의 저자는 권고하고 있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7월호(통권 496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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