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요한의 둘째 서간
진리 안에서 겸손하게 걸어가기 요한의 첫째 서간은 구체적 발신인이나 수신인 없이, ‘그리스도의 적’을 경계하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권고하는 내용인데 비하여 셋째 서간은 ‘가이오스’라는 개인에게 ‘원로’가 보낸 개인적 당부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두 서간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둘째 서간이다. 이 서간은 내용상으로는 요한의 첫째 서간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으나 형식상으로는 셋째 서간과 공통점이 있다. 발신인이나 수신인, 인사말 등 서간 형식을 갖추지 않은 첫째 서간과는 달리 둘째와 셋째 서간은 둘 다 편지 형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발신인과 끝인사의 내용까지도 유사하다. 이처럼 요한의 둘째 서간은 요한의 첫째 및 셋째 서간과 각각의 교집합을 이룸으로써 세 서간을 요한계 문헌으로 엮어 주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이 서간은 “원로”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1절)에게 보낸 것으로,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으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밝히기는 쉽지 않다. 일단 원로가 연장자에 대한 단순 호칭인지 아니면 당시 형성되어 있던 직분을 일컫는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또한 그 원로가 직분의 명칭이라면, 사도 대신 굳이 원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서간의 저자가 예수의 제자 요한이 아닌지, 주님의 제자 요한이 연로하여 자신의 연륜을 앞세워 스스로를 원로라 칭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원로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인물들로 볼 수도 있겠지만 교회를 의인화한 표현일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되어 왔으니 교회를 ‘부인’으로, 교회 구성원을 ‘자녀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은 서간의 끝인사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선택받은 그대 자매의 자녀들이 그대에게 안부를 전합니다”(13절). 즉 이 서간의 수신자는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이고 발신자가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선택받은 부인 자매의 자녀들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서간의 내용은 자매 간의 소통이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를 볼 때 선택받은 부인이란 개인을 특정하기보다 이 서간의 저자가 그리스도의 정배로서의 교회공동체를 부를 때 선호했던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진리와 이단 요한의 둘째 서간은 불과 13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적’의 속임에 넘어가지 말라는 간결하고도 강력한 당부를 전하고 있다. 서간의 저자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명, 진리, 사랑’으로 요약 제시한다(4-6절). 각 개념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나, 그 계명이란 새로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계명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로맨틱한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셨던 사랑, 곧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이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이들이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온갖 종류의 거짓과는 어울릴 수 없다. 서간의 저자는 이처럼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고 표현하며 함께 기뻐한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4절)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이 바로 속이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적”(7절)이다. 이미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의 정체에 관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밝혀 놓은 부분이 바로 요한의 둘째 서간 7절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신자들을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속이는 자들이다. 다름과 오류의 함정 요한의 둘째 서간은 짧지만 단호함으로 큰 가르침을 준다. ‘속이는 자들과는 인사조차도 하지 마라’(10절). 이것은 좀 심한 것 아닌가? 교회일치운동과 종파 간의 대화가 오가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편협해 보이기까지 한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던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포용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름’을 포용하는 것과 ‘오류’를 용인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다름을 포용하는 것이란 ‘나’를 온 세상의 중심으로 두지 않는 겸손한 행위이다. 하느님 창조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이는 틀린 것을 용인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틀린 것을 용인하는 것은 자기애에 기반한 두려움 또는 사심에서 나온다. 우리는 오류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입을 수도 있는 상처가 두려워 종종 너그러움이라는 가면 뒤로 숨기도 한다. 또는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픈 사심에서 침묵을 선택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와 맞바꿔 스스로의 평판을 높이는 어리석고도 비겁한 교만을 저지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다름의 포용이며, 어디부터가 오류를 용인하는 것일까? 서간의 저자는 그 기준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함을 천명한다. 이는 다원화된 세상, 저마다 다른 신앙, 다른 신념을 지닌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갈등을 피하고자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진 신앙생활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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