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요한의 셋째 서간
선의 편에 서십시오 요한의 셋째 서간은 요한의 서간들 중 가장 편지다운 편지라 할 수 있다. 서간의 저자는 실명을 밝힌 가이오스라는 인물에게 제삼자의 실명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자신의 용건을 전달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사적인 내용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서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교회에 해당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수신자 가이오스 가이오스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총 다섯 번 나오며, 요한의 셋째 서간을 제외하고 모두 사도 바오로와 관련이 있다(사도 19,29; 20,4; 로마 16,23; 1코린 1,14). 이 네 개의 본문에 등장하는 가이오스라는 인물이 바오로의 선교 활동에 호의적이라는 데에는 공통되나 각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거주지 또는 출신지는 다르다. 이들 모두가 동일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인물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은 바오로의 서간과 요한계 문헌은 시간적으로 최소 30년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서간의 수신자 가이오스를 앞의 어느 인물과 동일시하기에는 무리라고 본다. 요한의 셋째 서간은 보편 서간으로서는 드물게 한 개인에게 보낸 서간이지만, 우리가 이 서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가이오스 개인의 신상이 아니라 그가 당시 공동체 안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다. 서간의 저자는 가이오스가 “낯선 이들”을 위하여 성실히 봉사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며, 무보수로 일하고 있는 그들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5-8절). “낯선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7절)이다. 종합해 보면, 가이오스는 지역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맞이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교회를 돌보는 원로의 입장에서 지역 교회에 가이오스 같은 믿을 만한 협력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었겠는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교회 가이오스가 원로의 기쁨이었던 것에 반해, 디오트레페스는 원로의 고민거리였다. 가이오스와 마찬가지로, 디오트레페스의 신상에 관해서도 역시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서간에 묘사된 그의 행위를 통하여 당시 해당 공동체의 문제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디오트레페스는 “우두머리 노릇 하기”(9절)를 좋아하여 원로와는 대립 관계에 있다. 그는 원로를 나쁜 말로 헐뜯고 원로가 보낸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심지어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까지 방해하여 교회에서 쫓아낸다(10절). 이 서간에는 앞서 다룬 두 서간과는 달리 이단에 관한 경고나 믿음, 사랑의 본질에 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없다. 여기서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원로는 참된 증언의 전승자로서 지역 교회를 감독하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원로가 이미 해당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던 점, 그리고 앞으로 그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디오트레페스의 행실을 지적하겠다고 경고하는 점(9-10절) 등을 고려하면, 신앙 공동체의 기준에서 볼 때 디오트레페스보다는 원로의 위치가 우위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디오트레페스라는 인물은 해당 교회에서 ‘세속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본인 스스로도 원로의 요청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원로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오히려 진리를 전승하고 보전하는 원로의 영향력이 그보다 못한 듯하다. 디오트레페스 개인의 의견에 따라 지역 교회 공동체의 방침이 정해지고, 교회 구성원들은 그에게 동조해야 하며, 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축출되기까지 한다면, 이는 교회의 사유화이고 그리스도의 사유화다. 자신이 주님의 공동체로 부름받았다고 여기기보다는 자신이 주님의 교회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때나 가능한 행위이다. 그때도 지금도 요한의 셋째 서간은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사이의 한 지역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이루어진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세적 지위나 영향력을 이용하여, 주님의 공동체를 자신의 뜻에 맞는 집단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모습을 여전히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애초 좋은 마음으로 모인 이들까지도 주님의 길로 나아가는 데 방해를 받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묵묵히 선을 실천하는 이들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문제 앞에서, 서간의 저자는 악을 피하고 선을 택하도록 권고한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악을 택할 이들이 있을까마는,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때로는 불완전한 정보로 인하여 악을 선이라 믿으며 선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악인 줄 알면서도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영향력 있는 이가 속한 그룹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옳지 못한 시류에 묵언 동조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보편 서간의 마지막 가르침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그 구성원 개개인 역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공동선을 추구해 나갈 때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2월호(통권 500호 감사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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