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8) 예루살렘 입성(루카 19,28-40)
수난과 죽음 향해 걸어가신 평화의 임금 - 예수님께서는 벳파게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올리브 산을 내려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사진은 해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열리는 예루살렘 올리브 산의 성지 주일 행렬. [CNS 자료사진]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활동 기록은 크게 셋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활동기(4,14-9,50),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 예루살렘 활동기(19,29-24,53)입니다. 예루살렘 활동기의 첫 장면이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리코에서 사람들에게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입니다. 두 도시의 해발 고도 차는 거의 1000m나 됩니다. 그러니 “오르는 길”입니다.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19,28)는 표현에는 결연함 혹은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예수님 일행은 드디어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베타니아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추정되는 요르단 강 동쪽 베타니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쯤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맞은 편 동네”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를” 풀어 끌고 오라고 분부하십니다. 누가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라고 챙겨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고, 또 예수님께서 대답하라는 대로 대답하고 나귀를 끌고 옵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웃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올리브산을 내려오시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앞에 자기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것은 구약의 다윗 왕이 아들 솔로몬을 노새에 태워 데려와 임금으로 삼도록 한 것을 연상시킵니다.(1열왕 1,33-39) 또 길 위에 겉옷을 깔아 놓는 것은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예후가 임금이 되자 신하들은 겉옷을 벗어 예후의 발밑 층계에 깔고 “예후께서 임금이 되셨다!” 하고 외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2열왕 9,13) 한마디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임금으로서 당신의 거룩한 도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19,37-38) 이 대목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하는 이유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본 모든 기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곧 병자를 고쳐주고, 눈먼 이를 보게 하고, 악령 들린 이를 풀어주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포용하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모든 것이 바로 제자들이 본 기적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이를 요약해서 전하는 대목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하면서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라고 노래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탄생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2,14) 하고 하늘의 군대가 찬미하는 노래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셨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하고 부르면서 제자들을 꾸짖어달라고 청합니다. 너무 소란스러워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임금님이라고 부르면서 환호하는 것이 못마땅해서일까요?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클 것입니다. 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서는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임금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심을 부인하고 거부하여 예수님을 배척한다면 그때에는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돌들이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벽에서 돌이 울부짖으면 골조에서 들보가 대답하리라”는 구약성경 하바쿡서 2장 11절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임금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임금처럼 권세를 휘두르는 권력자 임금이 아니라 평화의 임금님으로 제자들의 환호 속에 소박하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갈릴래아를 떠난 예루살렘 상경기가 예루살렘 입성으로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그 여정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 아니라 갈릴래아에서 시작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이 예루살렘 입성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가시는 목적지 예루살렘은 또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갈릴래아에서 두 차례, 그리고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차례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물론 당신의 부활까지도….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환호합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평화의 임금으로 환호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임금으로 환호하며 따르는지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면서 어떤 임금으로 고백하며 맞아들이는지요? 알아보기 벳파게와 베타니아 : 베타니아는 올리브산 동쪽 산비탈에 비탈에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베타니아는 예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시며 가깝게 지내신 라자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라자로의 무덤을 비롯해 가톨릭과 정교회의 기념 성당이 있지만 아랍인 마을이고 이스라엘이 친 분리 장벽으로 일반 순례객들이 순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벳파게는 ‘익지 않은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으로, 베타니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마을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도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900m)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벳파게로 추정되는 곳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관리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해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면 이곳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을 시작해 올리브 산을 내려오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6월 17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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