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다시 읽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끝없는 전쟁터”인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백성은 주님을 섬겼다. … 그 뒤로 주님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업적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나왔다.”(판관 2,6-10 참조) 여호수아기와 판관기 여호수아기와 판관기를 처음 읽은 것은 신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모세의 길고 긴 설교가 드디어 끝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 이야기와 그 전쟁을 이끄는 영웅들의 역동적인 이야기는 어린 신학생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잔소리’ 같던 그 신명기가 구약 성경 전통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여호수아기와 판관기가 그저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자꾸만 당신을 배신하다 쓰러지는 철부지들을 그때마다 일으켜 세우시던 아버지 하느님의 짝사랑 이야기임을 말이지요. 여호수아기와 판관기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하고(신명 6,5)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6,14-15) 신명기의 가르침에 한결같이 충실했던 여호수아와 그렇지 못했던 판관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 청출어람(靑出於藍)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주셨던 ‘자손 번성의 약속’은 이집트에서의 놀라운 인구 증가로 이미 실현되었고, 남은 것은 땅을 주시겠다던 약속이었습니다. 여호수아기는 ‘땅의 약속의 성취’란 관점에서 가나안 정복 역사를 기록하는데, 이점은 “하느님께서 …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다.”라는 표현들로 자주 강조되고 있습니다.(여호 2,24; 6,2; 8,1.7.18; 10,8.19.30.32)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하느님(야훼)께서 구원하신다(호쉬아 )’는 뜻으로 ‘예수’님의 이름과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과거 온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길 두려워하며 거부할 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백성을 독려했던 인물이지요.(민수 14,1-9) 과연 그는 “오직 너는 더욱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1,7) 하신 하느님의 그 말씀 하나만을 굳게 믿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손수 이끄셨고, 갈대 바다에서 하셨던 기적 그대로(탈출 14,15-31) 요르단 강을 갈라 백성을 건너게 하셨습니다.(여호 3장) 하느님께서 이렇게 여호수아를 마치 모세처럼 백성들 앞에서 높여주셨을 때도(4,14) 그는 결코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강을 건너자마자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기념비를 세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4장) 할례와 파스카 축제를 거행함으로써 율법의 가르침을 지키는 일이었으니까요.(5장) 이렇듯 일점의 흠도 없이 충직했던 여호수아의 곁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하느님의 전쟁(聖戰), 무조건 다 죽여? 이어지는 전투 사화들은(예리코 성[여호 6장], 아이 성[7장, 8장], 아모리족과 가나안 남부[10장], 가나안 북부[11장]) 현실적으로는 승리하기 힘든 경우로 자주 묘사되는데, 성경 저자는 ‘오직 하느님만이 이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6,2-5; 8,1-2) 그런데 전쟁 이야기를 읽으실 때 “모조리” 죽이고 불태우는 다소 잔인하다 싶은 장면들에 혹시라도 너무 불편해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완전봉헌(Herem)’ 장면 묘사는 후대 역사가들의 신학적 성찰이 반영된 결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전리품은 유일한 사령관이신 하느님의 것이며 남김없이 바쳐져야 한다.’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전쟁 개념과 ‘그래, 가나안에 처음 정착하던 바로 그때 우상숭배와 이방문화를 들여놓을 여지를 철저하게 없앴어야 했어!’라는 유배 이후 신학자들의 역사의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거지요. 사실 이방인 창녀 라합 이야기(2장), 기브온 사람들과의 타협 이야기(9장), 정복되지 않은 민족들의 목록(여호 13,1-7.13; 판관 1,21-36) 등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역사가 실제로는 이방인들을 무조건 다 죽이기만 하는 ‘잔혹사’가 결코 아니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판관시대, 배신과 구원의 반복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왔다.’(판관 2,6-10)는 사실은 판관기 역사 기술의 출발점이 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는 하느님의 축복의 선물을 오롯이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은 비단 판관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 우리 가정에 비추어서도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요.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정착한 뒤 하느님을 잊어가던 이스라엘은 가나안 주변 민족들(필리스티아, 에돔, 암몬, 모압, 미디안족)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위기의 순간마다 판관을 세우셔서 당신 백성을 구하셨는데, 판관기에는 모두 열두 명의 판관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자신과 관련된 전쟁 영웅담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대판관’(오트니엘[3,7-11], 에훗[3,12-30], 드보라[4-5장], 기드온[6-8장], 입타[10,6-12,7], 삼손[13-16장])과 ‘소판관’(삼가르[3,31], 톨라[10,1-2], 야이르[10,3-5], 입찬[12,8-10], 엘론[12,11-12], 압돈[12,13-15])으로 구분됩니다. 판관기에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죄→벌→회개→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같은 우상들을 섬기며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시기 위해 이방민족들 손에 넘기셨고, 이스라엘이 괴로워 부르짖고 회개하면 하느님은 매번 판관을 세워 그들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다 판관이 죽고 나면 그들은 또 하느님을 저버리길 반복했지요.(판관 2,11-19) 그렇게 반복되는 판관시대의 역사는 끊임없는 ‘인간의 배신과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판관기를 읽다보면 ‘아, 이들의 반복되는 답답한 죄의 역사가 바로 나의 오늘, 나의 역사구나.’ 싶어 마음이 쓰라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 백성이 죄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그때마다 다시 자비로운 얼굴을 보여주셨던 하느님, 매번 속고 또 속아주시면서도 다시 손을 내미셨던 판관기의 하느님 모습이야말로 역사 안에 직접 계시하신 당신의 진짜 본모습(!)이란 사실에 또다시 용기를 얻고 일어서게 됩니다. 작고 약한 이들로 이루신 구원 세습되던 왕직, 사제직과는 달리, 판관은 신분과 능력에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직접 뽑으신 이들입니다. 예를 들어 에훗은 왼손잡이(직역하면 “오른손이 묶인/마비된 사람”, 히브리 개념에서 장애인), 드보라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 기드온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보잘것 없는 씨족 출신이었고, 심지어 입타는 창녀의 아들로 건달이었지요. 삼손의 경솔하고 자만했던 모습은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이렇듯 판관으로 뽑혔던 이들은 인간적으로 보자면 하나같이 모자란 이들이었지만 인간의 생각과 기준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은 오히려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1코린 1,27 참조) 사실 판관들을 카리스마 넘치는 ‘초인(超人)’으로만 생각한다면 판관기의 역사는 그저 재미있고 통쾌한 전쟁 이야기가 되어버리겠지만 결코 완벽하지만은 않았던 판관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묵상할 거리들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은 미디안족을 쳐부수고 나서 백성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세우려하자 “여러분을 다스리실 분은 주님이십니다.”(판관 8,23) 하고 겸손되이 대답했지만, 곧바로 전리품 가운데 금고리들을 모아 에폿(사제의 예복)을 만들어 우상숭배의 빌미를 제공하는 잘못을 범합니다.(8,22-28) 입타는 암몬족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지도 않는 자기 식대로의 서원을 함부로 했다가 딸을 잃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했지요.(11,29-40) 삼손은 나지르인으로서 지켜야 할 서원(음주, 이발, 주검 접촉 금지)에 소홀하여, 사자를 죽이고 그 주검에서 꿀을 따먹기도 하고 부모에게 거짓말도 하고(14,5-9) 이방 여인들을 탐하기도 합니다. 성경 저자가 이런 판관들의 부족함을 그저 감춰두지만은 않은 것은 ‘땅의 정복과 인간 구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심’을, ‘하느님의 길을 걷는 이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기 위함이겠지요. 여호수아기와 판관기를 읽으시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당신 자녀의 삶은 무엇인지, 하느님께 충실한 모습과 그분을 저버리는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얼마나 한결같이 신실하셨는지를 잘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잘못할 때에는 분명 호된 매를 드시는 하느님, 그러나 돌이켜 당신께 손을 내미는 이는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그 분과 함께할 때에, ‘이방인의 땅, 전쟁터’ 같던 나의 일상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된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번 나눔을 마치면서 여러분을 삼손의 기도에 초대합니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 방종과 자만심에 빠져 살다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지만, 마지막 순간 다시 한 번 혼신의 힘을 다해 주님께 부르짖었던 삼손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응답하셨던 그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판관 삼손과 함께, 하느님께 청하여 받은 그 힘으로, 내 마음속 우상의 기둥과 교만함의 신전을 힘껏 밀어 쓰러뜨리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월간빛, 2018년 8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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