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86) 사형 선고(루카 23,13-25)
군중의 압박, 진실에 고개 돌린 빌라도 -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으나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의 거듭된 요구에 굴복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내주고 만다. 그림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장면을 묘사한 예루살렘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화. 가톨릭평화신문 DB. 헤로데에게 갔던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아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했지만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의 거듭된 사형 요구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넘겨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빌라도가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모았다”(23,13)는 구절로 이 대목을 시작합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고소한 당사자들이어서 예수님을 신문한 결과를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에서 지도자들이란 백성의 지도자 또는 최고 의회(산헤드린) 의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을 불러모았다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적어도 루카복음서에서 일반 백성은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백성의 큰 무리가 따라갔다”(23,27)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백성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23,35)고 전하면서도, 이들이 예수님께 어떤 적대적인 행위나 표현을 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백성’이란 일반 백성이 아니라 ‘백성 가운데 일부’ 혹은 ‘백성의 지도자’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빌라도가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전한 내용은 예수님을 신문해 보았지만 그들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빌라도는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조차도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전하면서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라고 단언합니다.(23,14-15) 그러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매질이나 해서 풀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루카복음에 언급되는 ‘매질’은 마태오복음이나 마르코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채찍질(마태 27,26; 마르 15,15)과는 아주 다릅니다. 후자의 채찍질은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에 죄수에게 고통을 주는 형벌입니다. 이 채찍질은 죄수를 탈진하게 해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빨리 죽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채찍에 동물의 뼈나 납덩어리를 달아서 채찍질했습니다. 반면에 루카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매질은 사형과는 무관한 매질이었습니다.(<주석 성경> 참조) 굳이 표현하자면 소란을 야기한 데 따른 훈육 벌이라고나 할까요. 빌라도의 이 말에 그들은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주시오” 하며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라빠에 대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라고 전합니다.(23,19)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이란 바로 로마 제국에 대항에서 일어난 반란을, 살인은 로마인이나 그들의 앞잡이들을 죽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바라빠가 그만큼 위험한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압바의 아들’ 곧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바라빠가 열혈당원의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로서는 당연히 바라빠가 아닌 예수를 풀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며 대놓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칩니다. 빌라도가 세 번째로 다시 묻습니다. 이번에는 물음의 강도도 더욱 셉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주겠소.”(23,20-22) 성경에서 숫자 3은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빌라도가 세 번이나 물어봤다는 것은 따라서 무죄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자기로서는 할 만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더 거세게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요구합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해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기록합니다.(23,23-25) 생각해 봅시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석사제들과 최고 의회에 속한 지도자들과 백성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을 때에 세 번이나 반대의 뜻을 표명했습니다. 그렇지만 군중의 요구가 점점 더 거세지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고 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3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라고 할 때에 빌라도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라도에게 아무런 탓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빌라도는 끝까지 밀고 나갔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라는 요구에 굴복하고 만 것은 총독으로서 정의를 세워야 할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시위자들이 거세게 압박한다고 해서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나는 이런 ‘빌라도’ 과에 속하지 않는지요? 내게 닥칠 손해나 위험 때문에 그릇된 일에 눈을 감아 모른 체하거나 굴복해 버리곤 하지는 않는지요? 알아보기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시행되던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로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 맹수에게 잡혀먹혀 죽게 하는 맹수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한 사형 방법으로 꼽혔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들은 죽을죄를 지었어도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예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자유민(외국인)들은 로마나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중죄를 지었을 때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는 날강도들,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의 양팔을 벌리게 하여 두 손목을 십자가의 가로대에 결박해 고정시키고, 두 발목은 세로대에 결박한 후 십자가를 세워 죽이는 형벌입니다. 두 손목과 발목은 줄로 결박하기도 하고 대못을 박아 고정시키고 합니다. 그러면 사형수는 호흡 곤란으로 질식사하거나 아니면 피를 많이 쏟아서 죽게 됩니다. 루카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채찍질했다는 내용이 없지만, 마태오ㆍ마르코ㆍ요한복음에서는 모두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했다는 표현이 있어(마태 27,26; 마르 15,15; 요한 19,1), 예수님께서도 모진 채찍질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형을 받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1월 11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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