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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가난한 과부의 풍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17 조회수7,609 추천수1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가난한 과부의 풍요(Der Reichtum der armen Witwe)

 

 

헤로데 대왕이 시작한 대규모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에는 ‘여인들의 뜰’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 뜰 회랑 뒤편으로 헌금을 받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서 모인 돈은 성전 유지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정기적인 희생제사를 위해 쓰였습니다. 그 방의 이름이 바로 ‘보물의 방’이었지요. 사람들은 여기서 헌금을 하며 액수와 그 용도를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러 개의 헌금함마다 성전관리들이 앉아서 동전이 규정과 규격에 맞는지, 액수가 원하는 용도만큼 충분한지 등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헌금함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라면 그때마다 누가 얼마의 돈을 내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큰 액수의 돈을 내는 사람은 특히 크고 명확한 목소리로 자신의 헌금액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주변 사람 누구나 다 듣고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헌금함 가까이에 계시면서 헌금 액수와 그 용도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소리를 들으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오가는 가운데, 많은 부자들이 와서 큰돈을 내기도 합니다(마르 12,41 참조).

 

이때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천천히 눈앞에 그려보면, 대개 이렇습니다. 곧 본토의 유다인들,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이 분주히 오고 갑니다. 그 가운데는 노인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이도 있습니다. 각자의 신분과 출신은 이미 그들의 옷차림에서 드러나고, 때로는 흔히 그들의 말투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전 두 닢

 

연중 제32주일(나해)의 복음인 마르코 복음서 12장 41절에서 44절의 말씀은, 한 가난한 과부가 보물의 방에 와서 헌금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여인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 옷차림이 말해줍니다. 과부라는 사실도 입은 옷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이중으로 비참한 삶을 삽니다. 가난할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서 오는 법적인 보호나 도움도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사제에게 헌금을 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러면서 이 과부가 내는 돈이 렙톤 두 닢이라는 사실을 듣고 아십니다. 렙톤 한 닢은 당시 가장 작은 동전 단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에 깊은 감동을 받으십니다. 이 얼마나 강렬한 대비일까요! 방금 나간 저 부자와 여기 이 가난한 과부! 조금 전의 저 값비싼 은화와 여기 이 작은 동전 두 닢!

 

예수님은 전체 맥락도 함께 보십니다. 부자에게는 은화 몇 개 바치는 게 그리 고통스러운 일도, 자신에게 어떤 손상을 가져다주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그 작은 돈이 그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어쩌면 동전 두 닢이 가난한 과부에게는 내일의 양식으로 남겨 둔 전부입니다. 동전 두 닢이 과부에게는 말 그대로 삶에 필수적입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것을 과부는 반만 바치지도 않습니다. 사제에게 그저 동전 한 닢만 건넬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여인은 모든 것을 바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지닌 파급력을 알아채십니다. 물론 그분은 왜 이 여인이 모든 것을 바쳤는지를 잘 아십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아주 적은 것일지라도 자신이 가진 것이 성전을 꾸미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여인은 하느님의 집을 두고 이루어진 약속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 여인을 가리키시며 방금 목격한 일을 이야기하십니다. 여인은 이미 떠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분명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당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서로 맞닿아 있음을 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당신의 영광이 세상에서 빛나도록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에게 아무런 유보 없이 모든 것을 다해 행동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애정 어린 행동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곧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집니다. 또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서로 함께하는 새로운 삶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흘러넘치는 애정을 감히 체험하기에 온당한 사람들을 매혹시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편에서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온 마음과 온 실존을 바칩니다. 렙톤 두 닢을 바친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에게는 이 ‘전부’에 대한 실재상징(Realsymbol)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종말에 대한 말씀(13장)과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 부분(14장) 바로 앞에 배치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바로 당신 목숨까지 ‘전부’를 바치신 예수님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이 이야기에 조금 앞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라는 성경 말씀의 의미도 훤히 밝혀줍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한다는 이 네 번의 ‘전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말해줍니다. 이는 듣기 좋은 온갖 말들을 뛰어넘습니다. 하느님께 “저는 전부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이 아름다운 말이 실제 현실에도 그대로 들어맞는지의 여부는 구체적인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가난한 과부에게서는 바로 이 여인이 동전 한 닢이 아니라 두 닢 모두를 바쳤다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선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이 선택은 돈, 시간, 가진 모든 것을 건드리고, 우리 삶을 깊숙이 파고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저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온전히 우리 전부를 바라십니다.

 

 

그래도 되나요?

 

이런 말을 하면 반론이 곧바로, 그것도 격렬하게 제기됩니다. 전부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야말로 끔찍한 분이 아니신가? 인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집어삼키는 분은 아니신가? 그런 하느님은 인간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은 아니신가? 가난한 과부에게서 마지막 돈까지 모조리 가로채고, 행복한 이에게는 복을 베푸는 데 인색한 분은 아니신가? 그 가난한 과부가 전부를 바쳤다면, 그 여인은 다음날 무얼 먹고 살라는 말인가?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도 질문의 방향을 올바른 ‘장소’와 올바른 ‘공간’으로 향하게 합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모호한 안개 속처럼, 초월적 세계 어딘가에 그 장소가 있는 것도, 다만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구체적인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 공간은 역사적이고 교회적인 차원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새로운 연대 가운데 살며 이 연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가난한 과부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음식을 나누고 고통을 위로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그러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인간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일도, 자유가 박탈되는 일도 없습니다. 거기서는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찾고 삶을 발견합니다.

 

 

밀가루 단지와 기름 병

 

이 사실을 또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는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언자에 대한 전설 형식으로 전해지기는 하지만, 바로 열왕기 상권의 이야기입니다(1열왕 17,8-16 참조). 여기서도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사렙타의 한 과부와 그 아들은 굶어 죽기 직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과부는 자신들에게 남은 마지막 먹을 것을 엘리야 예언자에게 내어줍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살고, 그렇게 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역사가 그를 통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과부 자신도 살고 그 아들도 살게 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비지 않는 밀가루 단지와 마르지 않는 기름 병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냥 놀고먹는 나라를 암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인간이 하느님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을 때, 거기서 생겨나는 흘러넘치는 풍요를 상징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이 근본 원칙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태와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형태와 그릇 안에서, 하느님 백성 각자가 내어놓는 것은 아무것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형태와 그릇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실제적인 현실이 된 교회 말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이나 걱정 없이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자신이 겪은 공동체 체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초기 교회에서 자신의 온 삶을 교회에 바친 과부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대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몇몇 부유한 과부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혼자인 채로 남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공동체가 그들의 삶을 감싸고 지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초기 교회는 교회 안의 가난한 이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가난한 이들까지도 구제하고 돌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새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하는 연대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연결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조용한 혁명을 그 안에 배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곧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값싼’ 처방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연대의 공동체’라는 말에서 마침내 화해를 이루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속한 원칙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이는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연대의 공동체는 저절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수난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하셨다고! 그렇게 해서만 공동체가 생겨날 수 있었다고!

 

그분을 뒤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만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그럴 때만, 공동체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가 밝히 드러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1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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