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Das Doppelgebot der Gottes-und Nächstenliebe) 기원전 1세기 무렵 이스라엘에 유명한 유다인 랍비가 살았습니다. 그는 지혜와 관용과 인내심으로 오늘날까지도 큰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바로 랍비 힐렐이지요.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하루는 한 이방인이 힐렐을 찾아왔다. 그는 기꺼이 유다인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수많은 온갖 계명이 그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그 모든 계명을 다 외우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다. 때문에 그 이방인은 힐렐 랍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꺼이 유다인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모든 율법, 곧 토라 전체를 요약해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에 힐렐 랍비가 그에게 말했다. “한 발로 서보십시오!” 그가 그렇게 하자 힐렐 랍비가 그에게 말했다. “토라 전체는 이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를 너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 물론 지혜롭고 경건한 힐렐 랍비가, 토라가 그러한 ‘황금률’보다 더욱 크고 심오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는 다만 그 이방인에게 유다 신앙이 지닌 합리성과 인간 친화적 특성을 넌지시 알려주려 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이 밝히신 계명의 핵심 마르코 복음서 12장 28-34절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예수님도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리십니다. 물론 그분에게는 이방인이 아니라 한 유다인 랍비가, 곧 율법 학자가 다가와 물음을 던집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토라에서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분의 대답은 힐렐 랍비의 대답보다 훨씬 훌륭하고 한층 정교합니다. 물론 질문을 던진 율법 학자가 한 발로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짧기도 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물론 예수님이 이 두 계명을 창안해내신 것은 아닙니다. 두 계명 모두 구약성경에서 유래합니다. 하지만 두 계명은 각각 서로 다른 곳에 들어 있습니다. 첫째 계명, 곧 ‘쉐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아)’의 시작 부분은 신명기에, 둘째 계명(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은 레위기에 나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두 계명을 그분이 하나로 연결시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만드시고, 이 이중 계명 안에 토라 전체를 요약하고 명문화하신다는 점입니다. 사랑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를 인용하시는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약성경 본문에는 없는 개념이 발견됩니다.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여기에 ‘정신을 다하여’라는 말을 추가하십니다. 달리 말해, 비판적인 사고력과 이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곧 사실에 정확히 부합해야 하고, 맹목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은 세상에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은 그 자체에서 끝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웃과 세상을 배제하는 모든 형태의 하느님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성경적 신앙이나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힘주어 다시 말하건대, 결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의 계명 전체를 두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 비범하고 대담하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어느 정도는 명백해졌으리라 여깁니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을지 반문하게 됩니다. 명백하다니, 정말로 그럴까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면, “네 친구는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여라.”라는 말이 오히려 명백합니다. 그런 생각이 고대 세계 전체에서 보통의 상식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결합한 사랑의 이중 계명은 결코 당연하지도 명백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 사랑의 계명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이 계명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님의 생애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더불어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하나로 묶어 이를 모든 것의 핵심으로 삼은 종교가 세상에 있다면, 이는 이스라엘과 무관하게, 또 그리스도교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늘 가련하게도 넘어지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지키기만 한다면,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랑의 이중 계명에 세상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사실도 결코 희미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들어 인류는 증오가 세상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히틀러와 그 동조자들은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는 목표 아래 육백만의 남녀노소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에 증오가 어떻게 되돌아오고 있는지를 우리는 뚜렷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새로운 국수주의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정당들이 세력을 얻고 있습니다. 개인과 다른 집단, 다른 민족들을 향한 냉대와 증오, 적대시의 거센 물결이 사회 매체들을 통해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악의적인 말들로 상대를 말살하려는 이들은 그것이 너무도 쉽게 자주 ‘피비린내 나는’ 잔학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 잘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계명의 핵심으로 가르쳐주신 사랑의 이중 계명은 성경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입니다. 아니, 그것은 세상의 중심입니다. 이 사랑의 이중 계명 없이는 세상이 멸망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은 하느님 백성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차원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필연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이는 사랑의 이중 계명 안에 숨어 있는 것으로, 이것 없이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 작동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동의하시겠지만, 성경은 인간이 이기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는 스스로가 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경도된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미 구약성경에서 말합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개인이 아무리 좋은 뜻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 속한 공동체에게 들으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은 기꺼이 이 계명에 따라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의 협력과 함께함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다른 이들도 원하고, ‘내가’ 살아가는 바로 그것을 위해 다른 이들도 살아간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아는 수많은 이들이 있는 곳, 하느님의 것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치는 이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 신앙의 형제자매들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 곳, 바로 그렇게 함께하는 공동체가 있는 곳에서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가 이루어지고,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이 형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공중에서 떠도는 신기루가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함께하는 연대가 없다면 그 사랑은 결국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은 먼저 시작하는 이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입니다.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뒤로 물러서서 자기 자신에게 말합니다.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른 이들이 뛰어들면 나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다른 이들이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그들에게 잘해주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에 바보가 되는 건 나뿐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면, 하느님 백성의 시작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이사야도 마리아도 없었을 테고, 결국은 예수님도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날 하느님 백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냥 시작하셨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시고, 아무 조건이나 보장 없이 그렇게 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은 잊는 사랑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는 당신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늘 또다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위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토대가 존재합니다. 그분이 먼저 시작하셨고 늘 또다시 그분의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이 존재하고 교회가 존재하고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2019년 시작에도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걸었던 다른 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웃 사랑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시고, 그 사랑에서 생겨난 평화 속에서 살 수 있게 하셨으니,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 한 해도 줄곧, 나 스스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고 하느님만이 선물로 주시는 그 사랑 안에 늘 머무를 수 있기를 서로에게 축원합시다. 이 사랑이야말로 언제나 마음의 깊은 평화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이미 영원한 부활의 기쁨이 무엇인지 압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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