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우상 숭배에 대하여는 먼저 저의 청소년 시절, 천주교 신자 친구들에게는 마리아를 믿는 우상 숭배자들이라고 비방하고 불자 친구들에게는 목탁이나 두드리면서 평생 빌어먹을 인생들이라고 악담을 하며 멸시했던 일들을 깊이 사죄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 문제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또 민감한 문제이기에 저의 생각과 느낌보다는 성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GIBONS"추기경님의 말씀을 토대로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신교 목사교장선생님과 집사담임선생님 밑에서 생활한 개신교계 중학교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교 3년 동안 행여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유명 불교 사찰로 갈 것을 계획할 경우에는 예외 없이 학우들 앞에 서서 반대를 선동했고 또 이를 항의하는 과정에서 지지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하였던 일들은 그저 철없는 어린 시절의 일이라고 덮어두기에는 너무나 큰 잘못들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당시 지금처럼 누가 단군 동상을 건립한다고 했다면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가 제일 먼저 그 동상을 파괴하려고 했었을 겁니다.
저는 그 정도의 과격하고 한편 열심(?)했던 이른바 한국의 기독청년이었기에 지금도 우상 숭배에 관한 한 개신교 형제들의 생각과 주장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겨지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선 그분들의 우상 숭배 배격 행위의 근거는 구약성서의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 모양을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출애 20,3-5)는 말씀이며 그 말씀을 보다 더욱 철두철미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이 분들은 조상 제사는 물론 누구를 문상할 때나 심지어 자기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도 절하지 않음은 물론 만일 어떤 사람이 불상 앞에 절을 하거나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 놓고 기도를 하거나 또는 예수님 성상 앞에서 꿇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곧바로 우상 숭배자들이라고 속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가톨릭에 대한 선입견 또는 편견이거나 오해와 일부 무지에서 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또한 그분들은 대개 가톨릭교회의 경배 행위에 등차(等差)가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에서는 초기부터
- 창조주 하느님께는 최고 최상의 흠숭지례(欽崇地禮:천주께만 드리는 흠모와 공경)를 드리고
-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께는 천사들과 성인성녀들을 초월한 상경지례(上敬地禮)를 드리며
- 모든 성인 성녀들에게는 공경지례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를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의 상경지례를 마리아 숭배라고 합니다 하기야 숭배라는 말에는 지극히 공경한다는 뜻도 포함됩니다만 이를 고의적으로 또는 느끼기에 따라서는 악의적으로 우상 숭배라는 뉘앙스를 풍기도록 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친히 세우신 가톨릭에서 영세 받은 신자라면 비록 그가 냉담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성모마리아만 우리의 구원자라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신자들은 마리아를 한 피조물로 인정하고 마리아가 누리는 모든 특권은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도할 때에도 하느님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소서” 라고 하며 성모님께는 다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라고 합니다.
여기에 관하여 어떤 개신교 형제들은 “어떻게 피조물인 성모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릴수 있느냐?” 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신경”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일 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사도신경” 중에 원래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 라는 구절을 그분들은 “모든 성도들의 교통함을 믿사오며” 라고 바꾸어 번역함으로써 다만 꼭 같은 내용(Communion:친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데서 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우선 개신교 신자들이 말하는 ‘성도’란 이 세상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신자들을 국한하여 이들과 서로 교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볼 때에 너무나 협소한 자유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도’라 함은 지상에 있는 성도와 이미 이 세상을 떠나 주님 곁에 계신 성도들을 총망라합니다.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2000년 전 이미 숨은 끊어져 죽었으나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아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마르 12,26-27) 이시라는 것입니다.
원래 “성도” 라는 말은 로마 6장22절에 근거합니다. 즉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거룩한 사람 (성인,聖人 ; 성도,聖徒)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우리들이기에 이 지상에서만 교통하고 저 세상에 가서는 교통할 수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이 믿어 오던 사도신경의 참 믿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모든 성도의 교통이라는 구절의 내용의 진정한 의미는 이러합니다.
즉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들 중에는 이미 죽어서 천국의 영예를 누리는 이들도 있고(천국 교회에서) 아직 이 세상에 생존한 성도들도 있습니다.(지상 교회에서) 이 두 부류의 신자(성도)들은 서로 서로 기도와 공로를 통교(通交또는通功)한다는 말입니다. 통교는 엄격히 말하면 연옥(단련 교회)까지 세 가지 부류이나 연옥 영혼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받기만 할 뿐입니다.
하늘에 있는 성도(천국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지상 나그네인 우리들은 우리 서로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지상 나그네들은 천국에 계신 천국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것이 2000년 동안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늘의 천사와 성인들이 우리의 간청을 들을 수 있을까? 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가 있으므로 눈을 빌리지 않으면 볼 수 없으며 귀 없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성인성녀들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은 똑똑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 반 이전에는 유럽과 미국간의 통신에 60일이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휴대용 전화로 또는 화상 전화로 바로 통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200년 전 누가 이를 예언했다면 아마도 그를 분명 미친 사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것이 사실입니다. 무선전화로 수십만리, 수억만리 떨어진 사람과도 통화할 수 있는데 하물며 과학의 신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하늘나라 형제들과 상통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시지 못하실 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천국과 지옥간에서도 대화가 된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루가 16,23-25).
그렇기에 하늘의 성인들과 땅위의 형제들과의 상통은 더욱더 쉬운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믿음이며 그것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초기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이에 관련된 성경을 몇 구절 조용히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교회의 가르침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모든 의문은 자연히 풀리게 됩니다 (마태 22,30 ; 창세 18, ; 출애 17, ; 바룩 1,13 ; 욥기 42, ; Ⅱ역대 7,15).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성모마리아께 뿐만 아니라 성 요셉에게도 또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녀 모니카에게도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성녀와 또 수많은 이름 모를 순교자들과 마귀를 쳐부수는 미카엘 대천사를 비롯한 모든 천사들과 자기를 일생동안 보호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명 받은 각자의 수호천사에게도 기도합니다.
이 모두가 즉흥적으로 기도하고 싶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성서에 근거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신자들을 보고 우상숭배를 한다고 함은 아마도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님을 비롯한 여러 성인성녀들의 성상(聖像)과 성화(聖畵)를 공경하는 것을 보고 또 그 성상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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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 공경 문제와 성상 파괴 행위>
※ 성상 공경 문제
사실 출애굽기 20장 3-5절의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라고 하신 말씀은 조상(彫像, 조각된 상)제작을 무조건 엄금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신(神)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행위를 금하라는 계명입니다. 보십시오.
성서의 여러 곳에 제작을 금지하고 또 다른 곳에는 “순금으로 거룹상을 둘 만들라”(출애 25,18) 하셨고 또 모세에게는 “구리뱀을 만들라”(민수 21,8) 고 제작을 명하셨으니 절대 금지란 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순을 행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룹’은 ‘하늘의 천사’이며 ‘뱀’은 ‘땅과 물속에 사는 양서 동물’이니 이는 하늘에 있는 것과 아래로 땅위에 있는 것과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을 만들라고 하신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개신교 신자들의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첫째 계명을 어긴 큰 죄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개 어느 가정에서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초상(사진)을 걸어 두지 않은 집이 없습니다. 산 이의 초상은 땅위의 것이고 죽은이의 초상은 하늘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성 요한 다마스체노(754년 시인,학자 교부)는 “유다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경향이 심하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미신의 오류를 면하고 진리를 알게 되어 하느님을 모시고 오직 그분께 흠숭지례를 드릴 줄 알며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더 완전히 더 풍부히 가졌으므로 어린 시대를 지나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유치원생이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식별 능력을 받아 형상 표시의 가능 불가능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설령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행하여지는 지나친(?) 성상 공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로 비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 우상 숭배는 아니며 가톨릭 신자치고 이교(異敎)의 우상과 가톨릭의 성상과의 근본적 차이를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가리켜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6,48)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더러 받아먹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밀가루로 만든 빵을 예수님의 “살이다” “몸이다” 라고 그대로 믿기에는 우리들의 지혜로는 한계가 있음도 사실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오로도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Ⅰ고린토 1,21)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라고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확실히 믿도록 만들어 주셨기에 더욱 감사드리며 그러기에 저는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 어느 곳 심지어 아프리카 오지에서라도 가톨릭 성당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당을 찾아가서 감실(즉, 살아 있는 “빵”“축성된 성체” 를 모셔 두는 곳) 앞에 꿇어 엎드려 최대의 흠숭의 예를 드리며 그분과의 대화 즉 기도를 드립니다.
이 같은 저의 행동을 보는 저의 개신교 친구들은 틀림없는 우상 숭배라고들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6,52) 라고 한 유다인들과 저의 친구들과의 차이를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할머니 여기 다윗과 솔로몬이 “야훼(여호와)”의 궤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하였었는 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베데돔」의 집에 하느님의「궤」를 모셔 두었기 때문에… 다윗왕은 너무나도 기뻐 하느님의「궤」를「오베데돔」의 집에서 자기 도성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다윗은 살찐 황소를 잡아 바쳤다”(Ⅱ사무엘6,12-13).
솔로몬왕은 자기에게 모여 온 이스라엘 회중을 이끌고「궤」앞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과 소를 제물로 잡아 바쳤다.“(Ⅱ역대5,6)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계약의 궤」안에는 오로지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싹이돋은 아론의 지팡이와 계약이 새겨진 석판들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히브9,4)
물론 그들의 행동만을 보면 우상 숭배처럼 어떤 특정 물건에 공경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솔로몬과 그 밖의 제사장들이 그 물체가 표상하는 하느님께 경배하지 않고 그 특정물「궤」에 경배했다고 하며 우상 숭배를 하였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아마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 예수의 성상 앞에서의 경배 행위를 우상 숭배 행위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성상 제작 풍습은 고대 유다민족 사이에서는 오늘날처럼 성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의 경향이 짙은 당시의 유다민족에게 또는 지리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는 이교민족에 둘러 쌓여 있던 유다민족에게는 성상 공경의 본뜻에 대한 오해가 일어날 우려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성상제조와 이방인들에게 그것을 공개하기를 매우 조심했었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성상이 이교도의 우상과 혼동될까 우려하였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가톨릭 내부에서는 신앙에 관한 상징적인 것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초기 박해의 3세기동안 가톨릭신자들의 밀회와 미사의 장소인 로마 카타콤바의 유적을 보면 성령의 상징인 흰 비둘기를 그린 벽면과 유리병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거기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형상과 어린양을 메신 주님의 형상을 새기기도 했으며 그리스도의 상징인 어린양과 믿음의 표시인 닻 모양과 교회를 의미하는 큰배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성상 파괴 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한때 이 성상 및 성화의 반대와 파괴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 최초의 반대자요 폭행자는 8세기의 “콘스탄티노플 황제 레오”이었으며 그 계승자는 그의 아들 “코프르니무스”였습니다. 이들은 성당의 성화를 불사르고 금, 은, 동, 철제 성상은 깨뜨려 자기 초상을 새긴 화폐를 만들고 성상파괴칙령에 대한 찬사 쓰기를 거부한 도서관 학자들을 도서관에 감금하고 3만권의 책과 함께 불살라 죽였습니다.
이 같은 만행은 헨리8세와 크롬웰처럼 겉으로는 신앙의 순결을 외치면서 이면 동기는 바로 탐욕으로 가득 찬 그것과 꼭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당시 용감한 수도자「스테파노」는 황제의 초상을 새긴 동전한 잎을 내밀며 “폐하,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 라고 묻고는 “짐의 초상이다” 라는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것을 내던지고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는 즉각 사형 선고를 받았지요. 형장에서 그는 황제에게 “아! 나는 한 나라 국왕의 모습을 모욕하여 사형을 당하는데 만왕의 왕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태우고 그 성상을 파괴한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 라고 하였다 합니다.
성상파괴의 독성행위는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자들도 저질렀습니다.
특히 영국, 독일, 네덜랜드에서 더욱 심했습니다. 8세기 성상 파괴자들이 성상의 금, 은을 욕심냈듯이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며 한발 더 나아가 성전마저 온통 점유해 버렸습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예배당 중에는 당시 점거한 그 당시 가톨릭 성당 그대로의 것도 있으며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들 만행이 만일 남부 유럽에서까지 침범했었다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불후의 대작들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을 것이며 개신교 신자들이 오늘날 가끔 사용하는 최후의 만찬 그림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극도의 독성이며 모독입니다. 이 같은 만행의 절정은 1917년 볼쉐비키 혁명 이후 구 소련에서와 아직도 자행되고 있는 중국과 북한에서의 파괴 및 성전 몰수 행위는 붉은 용(묵시12,3)의 악마적 만행이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수세기에 걸친 성상 파괴와 온갖 박해 속에서도 우리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성상과 모든 성인성녀들의 성상을 성당 내에 모시는 것은 옳은 일임을 확고이 선포하였습니다.
내용출처 : 김 안토니오 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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