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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예언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24 조회수8,062 추천수0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예언자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구약 성경에는 모두 16권의 예언서가 있습니다. 이 예언서들은 구약 성경의 1/4을 넘어서는 분량을 차지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문서를 남긴 예언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등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활동한 다른 예언자들도 있습니다. 이 예언자들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예언자란 누구인지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언자’라는 말은 주로 히브리어 ‘나비’(nabi)라는 말을 옮긴 것입니다. 이 말은 ‘부르다’라는 뜻의 고대어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말 구약 성경은 이 ‘나비’를 ‘프로페테스’(προφήτης)라는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의 앞에서’ ‘~를 대신해서’라는 προ-‎(pro-‎)와 ‘말하다’는 φημί‎(phēmí‎)에 ‘~하는 사람’의‎ -της‎(-tēs)가 합쳐진 것입니다. 곧 ‘하느님 앞에서 또는 하느님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 달리 말하면, ‘말의 능력’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를 일컫는 말 중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사람이라 부른 것입니다. 한편 사무엘의 이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예언자를 옛날에는 선견자라고 하였던 것이다.”(1사무 9,9) 이 ‘선견자’는 ‘보다’라는 말과 연관된 것입니다. 이 말은 예언자들의 환시(vision)와 연결되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도 되지만, 예언자들의 관점, 시각이 다르다는 차원에서 ‘하느님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 ‘세상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자’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예언자’라고 하면 흔히들 어디 동굴이나 산속에 또는 세례자 요한처럼 요르단 강가 어딘가에 외따로 기도와 명상에 빠져 살다가, 어느 날 지팡이를 짚고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사람들이 많은 도회지로 나가 광장이나 높은 지붕 위에 서서 머리를 가리고 있던 두건을 벗고 두 팔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경고의 말을 전하는 사람을 연상합니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 같은 사람을 상상하는데, 그건 그런 판타지에나 나오는 모습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깊은 동굴 속에서 촛불 하나 켜놓고 깃털 펜을 들고 양피지에 무언가를 적으려 고민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건 중세의 서양회화에나 나오는 이미지입니다.

 

실상 예언자들은 사람들 가운데에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이사야는 결혼해서 아이들이 있었고(이사 7,3; 8,3) 에제키엘도 아내가 있었습니다(에제 24,18). 호세아는 주님의 명령으로 결혼을 해 아이들을 낳았습니다(호세 1장). 아, 예레미야는 독신이었네요(예레 16,1). ‘목양업자’(아모 1,1)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은 사제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사촌의 땅을 매입하고 이를 공증하기도 합니다(예레 32,9-15). 그들은 다른 이들과 같이 어울려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이 겪는 일들,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부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래서 그 사회악들에 대해 고발하는 날선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또한 열정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신앙의 열성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선조들부터 동시대의 사람들에게까지 이르는 역사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곧 당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말씀과 행동의 출발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 축제나 제의에 대해 비판할 때도, 외국과의 협정이나 전쟁의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말할 때도, 타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전할 때도 모두 이러한 역사관(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루신 역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비판과 회개의 요구는 분명 쓴 소리였습니다. 임금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 화려한 전례를 주도하던 사제들, 착취와 부정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자들, 현세적 이익에 집중하던 백성들, 그들에게 예언자의 말은 듣기 거북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배척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고문과 투옥의 형벌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대한 신앙의 열정과 백성을 향한 뜨거운 애정으로 인해 멈추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비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겪은 환시, 환청, 황홀경 같은 신비체험 때문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사로잡혀 평범한 삶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언어와 행동, 생로병사의 고통과 희로애락의 감정까지, 자신의 전(全) 존재로 말씀을 전하기 위해 투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비범함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말씀을 듣는 이들이 단지 들음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을 찢는 회개로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께 속한 비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시대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 말씀을 전하는 자, 곧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자로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 삶, 내 역사를 되돌아보는 데서, 곧 ‘내 삶 속에 개입하시며 함께 해 오신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만들어 오신 역사’를 발견하는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019년 2월 24일 연중 제7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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