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아브라함만의 순명? 이사악의 협력!(창세 22) 이스라엘의 성조를 이야기할 때, 항상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야곱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시조가 됩니다. 하지만, 이사악은 다른 두 명에 비해서 그 역할과 등장에서 비중이 커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번제물로 봉헌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없이 그냥 불쌍한 희생양이 되는 모습이고(창세 22), 무기력한 눈먼 노인으로만 등장합니다(창세 27).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봉헌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사악을 그저 힘없는 어린아이로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는 이사악이 몇 살인지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하느님 연출에, 아브라함만 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로만 읽습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를 이사악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은 하느님 축복의 절정으로, ‘아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창세 22,2)로 표현됩니다. 이사악의 탄생은 하느님의 기적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백 살의 아브라함과 아흔 살의 사라에게 웃음을 가져다준 경사였습니다(창세 21,6-7). 이사악은 그 노부부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부모의 큰 사랑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이사악이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을 감지하지 않았을까요?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여정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를 단번에 알아차렸겠지요(창세 22,3-5). 이사악 또한 묵묵히 장작을 지고 아버지를 따라갑니다(창세 22,6).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7). 이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라며 짧게 대답하고 계속 걸어갑니다. 이 장면의 묘사는 이사악을 어린아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요소가 있습니다. 우선, 번제물로 봉헌하기 위한 준비물인 장작을 이사악이 들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이사악은 장작을 지고 갔습니다. 번제물을 봉헌하는 장작의 무게는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나귀에 싣고 가져오던 나무를 이사악이 들고 갔습니다. 이사악이 어린아이이기만 하였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아이”라고 부릅니다(창세 22,5). 여기에서 사용된 “아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나아르[na‘ar(רענ)]”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뒤에 등장하는 열일곱 살의 요셉이 “아이(na‘ar)”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창세 37,2).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이사악은 어린아이가 아닌, 적어도 청소년 이상의 나이이며, 무거운 장작을 지고 갈 수 있는, 제법 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에 이사악을 나았으니, 그 당시 아브라함은 백 살이 넘은 할아버지였습니다. 백 살이 넘은 노인이 장작을 쌓고, 장정에 가까운 이사악을 묶고 목에 손을 뻗쳐 칼로 찌르려고 합니다(창세 22,9-10). 상식선에서 바라본다면, 이사악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일이었음을 창세기는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가 저항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힘으로 아버지를 제압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니 그는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는 자신이 바로 번제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수동적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능동적 자기 봉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이 장면에서 중요하지만,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의 온전한 순명도 함께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소중한 것을 내놓는 순명과 목숨을 내놓은 순명을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또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빼앗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초대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면서 저항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통해서 우리도 순명을 결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더 큰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2019년 3월 17일 사순 제2주일 인천주보 4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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