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집념의 인간 야곱 I (창세 25-27)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버지의 믿음과 순명의 길을 따른 이사악에 이어서, 이제 성조의 마지막 인물 야곱을 창세기는 소개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어근을 살펴보면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야곱(בקעי)이라는 이름의 어근 ‘בקע’(āqab)’은 ‘붙잡다’, ‘기만하다’, ‘속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명사형 ‘aqeb은 ‘발뒤꿈치’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탄생 이야기는 “동생이 나오는데 그(야곱)의 손이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어,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다.”(창세 25,26)라고 전해줍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앞으로 전개된 그의 삶에서 “붙잡고, 기만하는 여정”과 발뒤꿈치를 바라보며 만나게 되는 형 에사우와의 경쟁 관계를 미리 암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붙잡으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붙잡는 삶을 살아간 야곱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온전하게 소개해 주는 인물은 야곱이 유일합니다. 우리가 위대한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알고 있는 모세도, 유다 왕국의 위대한 임금으로 추앙받는 다윗도, 성경에서 야곱처럼 온 생애를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온전한 일생을 다루는 야곱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시조입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시조, 야곱을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해 주고 있을까요?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어보면, 그 위인들은 남달랐습니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재능있는 비범한 유년을 보내면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해주는 이스라엘의 성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삶은 이름처럼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집착과 집념으로 똘똘 뭉친 삶이었습니다. 야곱은 노년에 자신의 삶을 파라오 앞에서 이렇게 회고합니다: “제가 나그네살이한 햇수는 백삼십 년입니다. 제가 산 햇수는 짧고 불행하였을 뿐 아니라 제 조상들이 나그네살이한 햇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창세 47,9). 집착과 집념으로 가득찬 자신의 삶을 그는 불행하였다고 회고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그는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자평하였을까요? 야곱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붙잡는 삶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붙잡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야곱은 쌍둥이 형 에사우와 경쟁을 시작합니다(창세 25,22). 모태에서 시작된 경쟁은 세상에 나오는 과정에서도 이어집니다. 야곱이 형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으면서 세상에 나왔지요(창세 25,26). 그가 집착을 부린 첫 번째의 것은 단순하게 발뒤꿈치가 아닌 형의 자리, 맏아들의 위치였다는 사실을 이어지는 이야기가 알려줍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에사우가 “붉은 것”을 찾자, 야곱은 형의 “맏아들의 권리”를 요구합니다(창세 25,29-34). 창세기가 전해주는 쌍둥이의 모습은 닮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에사우는 살갗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다고 전해주면서 둘이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창세 25,25). 외형만이 아니라 성격도 달랐습니다. 에사우는 사냥을 좋아해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 살았습니다(창세 25,27-28). 에사우가 사냥을 좋아했다는 것은 그가 급하고, 거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배고픔 앞에서 전통의 가르침인 “맏아들의 권리”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전통보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맏아들의 권리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지요. 그런 에사우의 성격을 잘 아는 야곱은 그것을 이용하여 맏아들의 권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쟁취합니다.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내는 것이지요(창세 27,1-29).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형 에사우의 분노를 유발하고, 살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창세 27,41). 자신의 집념과 집착이 가져온 결과, 그것은 축복의 모습이라기보다, 가족의 분열을 가져왔고,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집을 떠나서 지내야 하는 떠돌이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그러한 끔찍한 결과를 직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집착과 집념의 삶의 여정, 그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2019년 3월 24일 사순 제3주일 인천주보 4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집념의 인간 야곱 II (창세 28-33) 야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첫 번째 집념의 대상이었던 “맏아들의 권리”를 얻기 위해서 어머니 레베카와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아버지 이사악에게 맏아들을 위한 축복을 받아냅니다(창세 27,1-29).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야곱이 그렇게 붙잡고 속이면서 얻어낸 결과는 아름다운 해피앤딩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면서 행복한 마음이, 기쁨의 감정이, 성취의 만족감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였고, 가족과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지요. 그렇게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을 향해서 도망자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하란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 야곱은 베텔(하느님의 집)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불의한 야곱의 모습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기꺼이 나타나셔서, 절망에 빠진 야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창세 28,15). 야곱이 집에서, 천막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던 그 시간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약속에 힘입은 야곱은 하란에 도착하여 두 번째 집념의 대상을 만나게 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드라마틱한 라헬과의 첫 만남에서 야곱은 첫눈에 라헬에게 반하게 되었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칠 년 동안 일을 하게 됩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이것이 그에게는 며칠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창세 29,20) 라고 창세기는 알려줍니다. 칠 년을 며칠로밖에 여기지 않으면서 살아간 야곱.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혼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첫날밤을 보낸 여인은 그가 사랑한 라헬이 아닌, 라헬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아침에 레아라는 사실을 알아챈 야곱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그는 외삼촌에게 따지듯이 이야기합니다.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라헬을 얻는 대신 외삼촌 일을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라반은 작은딸이 맏딸보다 먼저 혼인을 할 수 없기에 그러했다고 하면서 라헬을 얻기 위해 다시 칠 년 동안 일을 할 것을 요구합니다(창세 29,25-27). 상황이 이리되니, 야곱은 예정에 없이 라헬-레아 자매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야곱의 혼인 과정을 살펴보면,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아버지와 형을 속였던 사건입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을 드렸고(창세 27,25),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형의 옷과 동물의 가죽과 털로 아버지를 속였으며(창세 27,22-23), 맏아들의 자리를 넘보았습니다(창세 27,19).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이 아버지께 행한 그대로 속아 넘어갑니다. 혼인 잔치는 야곱이 어머니에게 받은 음식을 떠올리게 하며, 첫날밤을 치르는 그 시간은 밤이 되어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동생 라헬이 아닌, 레아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맏이의 권리를 탐낸 야곱에게 그 자리가 갖는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처럼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기만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냈지만, 이제는 자신이 속인 그 방법대로 속아 넘어가게 된 것이지요.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는 장면과 야곱이 라반에게 속는 장면은 야곱의 잘못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그렇게 가해자에서 희생자로 입장이 변화됩니다. 야곱이 자신의 행위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받는 보속의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하였지만, 야곱이 사랑한 여인은 레아가 아닌 라헬이었습니다. 집념의 인간 야곱은 라헬에 대한 집념과 집착을 가지게 되었고, 여기에서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됩니다. 야곱 자신의 집념으로 가정을 분열시켰다면, 라헬을 향한 야곱의 집념으로 라헬과 레아의 분열이 야기되었고, 야곱은 고스란히 그 갈등과 분열의 희생자가 되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갈등은 이제 라헬과 레아의 갈등으로 연장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보속을 행한 야곱. 자신의 집념으로 인해 생기는 분열의 희생자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게 됩니다. 성숙이라는 이름과 거리가 먼 야곱의 여정 앞에, 이제 세 번째 집념의 대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31일 사순 제4주일 인천주보 4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야곱의 집념 III (창세 37-50) 창세기 36장까지의 야곱의 여정을 돌아보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붙잡고, 속이고, 기만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의 그 집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되는 보상을 얻게 되지만, 그로 인한 상처와 분열의 대가도 혹독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집념은 다시 사랑하는 여인 라헬에게 이어지고, 이는 라헬과 레아 자매의 긴장으로 이어지며, 그 긴장은 고스란히 야곱의 아들 세대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야곱의 세 번째 집념의 대상 요셉이 등장합니다.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태어난 요셉.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이사악이 야곱과 에사우를 힘들게 얻은 것처럼, 요셉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얻게 된 소중한 자녀였습니다(창세 30,22). 그러니, 야곱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아준 요셉을 그 어느 아들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편애에 대하여 창세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창세 37,3). 야곱의 집념이 요셉에게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하지만 앞선 두 번의 집념이 가져온 대가처럼, 이 집념이 가져올 긴장 또한 알려 줍니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요셉)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창세 37,4). 처음 두 번의 집념의 희생은 야곱에게 고스란히 돌아왔습니다. 가족의 분열, 라헬과 레아의 긴장으로 인한 불편함.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 희생의 대가가 야곱 자신에게도 돌아오지만, 사랑의 대상인 요셉에게도 일어납니다. 다른 형들과의 긴장이 예고됩니다. 야곱의 집념은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증오하도록 만듭니다. 그러한 미움은 미움이라는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요셉을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합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는 요셉이 더 이상 아버지의 품이 아닌 낯선 땅, 이집트로 팔려가게 만듭니다(창세 37,12-36). 그렇게 야곱은 자신의 집념으로 자신이 편애한 요셉을 잃어버립니다. 물론, 창세기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셉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가 전개됩니다(창세 37-50).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요셉의 성실함과 하느님께 대한 신앙 속에서 헤어졌던 형제들과 다시 화해를 이루게 되고, 온 가족이 요셉 덕분에 이집트에서 가족이 다시 모여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긴장 관계가 다시 요셉과 그의 형제들로 이어지는 화해와 용서의 과정이 마무리되면서, 창세기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책의 마지막에 요셉의 입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아버지의 집념의 희생으로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20). 야곱의 집념과 함께 시작된 여정이었습니다. 사기와 기만으로 남에게 악을 행하고, 그 대가를 다시 고스란히 돌려받는 여정을 야곱은 걸었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상처와 아픔, 고통과 슬픔이 함께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집념에서 시작된 역사, 집념의 상처에서 시작된 여정을 선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라는 신앙의 이야기로 창세기는 마무리됩니다. 집념의 인간 야곱도 성숙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처럼 맏아들에게만 마지막 축복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아들들에게 축복을 전해주며 성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합니다(창세 49,3-28). 야곱, 그는 집념의 인간이었고, 성숙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여정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고, 야곱의 집념으로 일그러진 이야기를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집념의 인간 야곱/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시조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그의 여정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여정 속에서, 우리의 모습에도 집념과 집착이 넘쳐나지요. 하지만, 그 여정 속에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다는 사실을 창세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에서 이끌어 주시는 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집념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선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2019년 4월 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인천주보 4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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