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3) 초대 교회의 모습(사도 4,32-5,11)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는 성령을 모독하고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그림은 퀴스타보 드레의 성경 판화 ‘하나니아스의 죽음’. 사도행전의 이 대목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4,32-37) 다른 하나는 모두가 예외 없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음을 알게 해주는 구체적인 사례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이야기입니다.(5,1-11)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4,32-37) 루카는 2장 42-47절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개종한 첫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요약해서 전한 데 이어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압축해서 소개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4,32) 이렇게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자 “그들 가운데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4,34ㄱ)고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재산의 공동 소유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고 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살아가는 삶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4,33)고 루카는 전합니다. 그렇다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진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사도들의 증언과 가르침을 믿고 따름으로써 신자들이 모두 하느님의 큰 은총 속에 살아가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가진 것을 공동 소유로 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합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4,34ㄴ-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은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재산 관리에 사도들이 최고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루카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4,36-37)고 전합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이 레위인은 사도행전 9장 이후에 바오로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인데, 요셉이라는 이름보다는 바르나바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바르나바가 이렇게 자기 밭을 팔아 사심 없이 그 돈을 사도들에게 갖다 준 것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11,24)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모두 바르나바처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가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5,1-11) 우선 줄거리를 살펴봅시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함께 재산을 팝니다. 그런데 하나니아스는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사도들 앞에 갖다 놓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니아스에게 왜 “성령을 속이고” 땅값 일부를 떼어놓았냐고 추궁하면서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라고 질책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니아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지고 맙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젊은이들이 그 시체를 메고 나가 묻습니다.(5,1-6) 세 시간 후에 아내 사피라가 들어옵니다. 그 여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땅을 판 값 전부냐고 묻자 그 여자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요. “어쩌자고 그대들은 서로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오? 보시오. 그대 남편을 묻은 이들이 바로 문 앞에 이르렀소. 그들이 당신도 메고 나갈 것이오.” 그러자 그 여자도 바로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그 여자는 남편 곁에 묻히고 “온 교회와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루카는 기록합니다.(5,7-11) 이야기를 요약하면 부부가 땅을 판 값 가운데 일부를 떼어놓고 나머지를 갖고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도들 앞에 바쳤고, 그 결과로 죽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재산 일부를 빼놓고 바쳤다고 해서 죽음까지 당하는 것은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지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지 재산을 빼돌리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성령을 속이고 시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재산을 판 값을 사도들 앞에 갖다 놓으면서 일부를 떼어 놓았습니다. 사실 그 돈은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속였습니다.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잘못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런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가 비록 사도들을 속이는 잘못을 했지만, 그것이 죽음을 초래할 정도로 심한 잘못인가. 베드로가 너무 심하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에게 단순히 거짓말을 했다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다고, 하느님의 영을 시험했다고 질책합니다. 말하자면 이 부부는 성령을 속이고 시험하려 함으로써 성령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부의 죽음은 성령을 모독한 결과입니다. 성령을 속이고 하느님의 영을 시험했다는 베드로의 말에 들어 있는 의미를 더 생각해 봅시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시작하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커가는 이 공동체는 단지 여느 인간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공동체는 성령이 함께하시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도들 앞에서 속이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바로 그 공동체에 함께하시는 성령을 속이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삶, 곧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신자들의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진 것을 내놓고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성령의 은총보다는 자신들의 사심에 마음이 쏠렸기에 가진 것을 다 내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 마음을 열어드리도록 늘 노력해야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14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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