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6) 일곱 봉사자를 뽑다(사도 6,1-7)
봉사자는 평판 좋고 성령과 지혜 충만해야 - 예루살렘의 신자 공동체 안에서 식량 배급 문제로 불화가 생기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제안으로 공동체는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명의 봉사자를 뽑는다. 이들이 가톨릭교회 부제 제도의 시작이다. 서울대교구의 부제 서품식에서 주교들이 수품자들에게 안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사도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하며 끊임없이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공동체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는 무엇이고 공동체는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 곧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립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6,1)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는 크게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인들로서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된 유다인들입니다. 이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상용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가 아닌 다른 지역 곧 이집트나 키프로스, 소아시아 등지에서 태어나 살다가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다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히브리어나 아람어보다는 당시에 지중해 연안에 통용되던 그리스어에 더 익숙했을 것입니다. 홀대당하는 그리스계 과부들 그리스계든 히브리계든 이들은 유다교 신앙과 신심에 젖어 있다가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여 제자 공동체를 이룬 이들입니다. 이 공동체는 아직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써 신자가 된 이들 유다인들은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아 쓰면서 한마음 한뜻이 돼서 지냈습니다.(2,42-47; 4,32-37; 5,12-16 참조) 그런데 신자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스계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당한 것입니다. 식량을 배급하는 책임자는 물론 사도들이었습니다.(4,35.37 참조) 하지만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사도들만으로는 식량 배급을 관장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들에게는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가르치는 일과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힘없는 과부들, 그것도 그리스계 과부들이 상대적으로 홀대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결국 불평을 터뜨리고 맙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열두 사도가 나섭니다. 그들은 신자 공동체를 불러 모아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면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기고 사도들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다”고 제안합니다.(6,2-4) 여기서 식탁 봉사란 단지 음식 시중을 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매일 식량을 나눠주는 일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식탁 봉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 봉사, 곧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우선적인 사명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대신해서 식탁 봉사를 할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그들이 식탁 봉사를 하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겠다는 것입니다. 봉사자의 기준 사도들이 제시하는 기준은 주목할 만합니다. 우선 평판이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평판이 좋지 않으면 오히려 추문을 불러일으키고 일을 더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판만 좋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만큼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인간적으로 지혜롭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지혜, 곧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그런 지혜를 지닐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이런 제안에 공동체는 모두 동의하고 일곱 사람을 뽑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일곱 사람을 뽑았다는 것은 이 일곱 사람을 통해서 식탁 봉사 또는 식량 배급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그 일곱 사람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를 비롯해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그리고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입니다.(6,5) 학자들은 이 일곱 사람의 이름이 모두 그리스말 이름임을 주목합니다. 그리스계 과부들이 홀대를 당했기에 그리스계 신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이 일곱 사람을 뽑아 사도들 앞에 세우자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합니다.(6,7) 교회에서 공동체의 직무를 맡길 때 기도하고 안수하는 전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또한 세례에 이어 성령을 베풀 때나(8,17; 19,6 ), 병자를 치유할 때(9,12.17; 28,8) 그리고 사명 수행을 위해 파견할 때도(13,3) 안수를 합니다. 이 관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공동체 내부의 불화를 낳은 식량 배급 문제를 일곱 봉사자를 뽑아 해결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고 루카는 마무리합니다.(6,7) 알아보기 일곱 사람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루카는 스테파노에 대해서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루카가 스테파노에 대해 특별한 의도를 갖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실제로 루카는 이어 오는 대목에서 스테파노에 대한 아주 긴 내용을 소개합니다.(6,8-8,1) 그래서 일곱 봉사자를 뽑는 이 대목(6,1-7)이 스테파노의 이야기를 도입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스테파노에 대해서는 계속 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필피포스 역시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8,26-40) 니콜라오스에 대해 루카는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니콜라오스는 유다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초기 신자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일곱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식탁 봉사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이들이 식탁 봉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스테파노와 필리포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일곱 사람은 식탁 봉사만이 아니라 말씀 봉사의 직무도 수행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이 일곱 봉사자가 했던 일을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부제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봉사자는 교회의 첫 부제들인 셈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5월 5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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