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경기도에 사는 김훈 씨는 네 살 되던 해 자동차 사고로 부모님을 잃게 되어 먼 친척 집에서 자랐다. 신자가 아닌 집안이었으니 자기가 유아세례를 받은 줄도 모르고 지낸 것이다. 그러다가 마흔을 넘기고 우연한 기회에 성당에 나가게 되어 프란치스코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후 아내와 자녀들도 자연스레 성당을 찾았다. 김씨를 길러준 친척은 이들 가족이 모두 성당에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아 그러고 보니 네 부모님들도 독실한 신자였고 뭔 장인가도 했다더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얘기를 듣고 김씨는 의아해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부모님의 본명이라도 알고 싶어 [부모님이 살았던 지역 성당을 찾아 교적을 확인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김씨 자신의 이름과 야고보라는 세례명도 나와 있지 않은가. 김씨의 부모는 김씨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했던 것이다.] 김씨는 거의 40년 만에 신앙을 되찾게 된 것이다. 자신이 몇 대째 내려오는 신자인 것을 알게 된 김씨는 오묘하게 여겨지는 섭리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세례를 두 번 받으면 어떻게 되나'' 의문이었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궁금하다고 물어왔다.
답변)
가톨릭 교회의 세례성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의 구성원 자격을 주어 그리스도교인으로 탄생시키는, 영적 출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교회법 제849조 참조). 한 사람의 지상 생명이 일회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출생으로 시작되듯이 영적인 생명을 낳아주는 세례 역시 일회적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세례는 주교나 신부 또는 부제가, 승인된 전례서의 규칙대로 집전해야 한다. 그러나 정규 집전자가 없거나, 그러한 집전자가 세례를 집전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합당한 의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리고 긴급히 필요한 경우에는 이 성사의 유효 요건들만 지키면서, 세례를 베풀 수 있다(교회법 제861조 참조). 여기서 말하는 성사의 유효 요건이란, 최소한으로는, 세례받을 사람을 물(자연수)에 잠기게 하거나(침수례 = 沈水禮), 세례받을 사람에게 물을 부으면서(주수례 = 注水禮) "성부와 성자와 성신(성령)의 이름으로" 거행한다는 뜻이다(교회법 제854조 참조).
세례성사가 이렇게 집전될 수 있기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신자는 물론 신자 아닌 사람에게도 주요교리를 가르쳐 유효하게 세례를 줄 수 있고, 개신교의 목회자가 집전한 세례도 최소한의 유효 요건을 확인할 수 있다면 유효한 세례로 인정해야 한다(교회법 제869조 2항 참조).
따라서 어느 누구에 의해서,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 세례를 받든지 교회가 승인한 세례의 예식 중에 최소한의 유효 요건들을 갖춘다면 세례는 효과 있는 것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성사이다(교회법 제845조 2항, 제850조 참조). 가톨릭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 중에 반복될 수 없는 성사는 세례 외에도 견진과 성품이 있고, 이 성사들의 공통점은 성사를 맏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 분의 직분을 위임받는 인호가 새겨지는 것이다.
세례성사의 집전과 유효성에 관한 교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실천적인 면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다. 예를 들면, 개신교에서 개종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톨릭교회에서 정식으로 세례받기를 원하고 있는 형편이다. 개신교에서 이미 받은 세례가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니까 개종에 필요한 보충예식만 거행하면 된다고 해도 다시 세례를 받겠다고 떼를 쓰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심리적으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 시작한다는 걸 본인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싶어서 그럴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냉담하다가 신앙의 회복을 위해 다시 세례성사 받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세례를 받았지만 교리를 비롯한 교회생활을 잘 몰라서 냉담하게 되었으니, 교리도 다시 배우고 세례도 다시 받겠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이런 예들은 세례성사의 효과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억지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례는 일생에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는 성사이고, 유효하게 베풀어졌다면 어떤 이유로도 취소될 수도 없고 반복될 수도 없다. 다만, 세례를 받긴 했지만 유효하게 수여되었는지 의심스러울 때라든지, 세례자체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의심스러울 때에는 신중한 조사를 거쳐 조건부로 수여될 수는 있다(교회법 제869조 1항 참조).
김훈 씨의 경우는, 유아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부모의 불행한 사고로 말미암아 가톨릭 신앙을 모르는 친척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했기에 자신이 세례 받은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예비자 과정을 거쳐 세례받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같은 성사를 두 번 받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또 두 번째 세례를 집전한 사제도 김훈 씨의 유아세례를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씨의 양육을 맡았던 친척이 막연하게나마, 그 어머니가 신자였다는 말이라도 하였더라면 문제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탓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김씨가 세례를 다시 받은 것은''죄''가 될 수는 없지만 성사는 남용되었고 따라서 남용된 성사는 무효로 처리되어야 마땅하다.
두 번째 세례를 받는 과정이 어떠했든, 사회적 표현을 빌리자면 김훈 씨는 출생신고가 이중으로 되어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두 번 세례성사를 받은 것이 확인된 지금 김씨는 유아 때 받은 세례를 유효하고 적법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본당 신부님께 자신의 사정을 말씀으리고 도움을 받아, 유아세례를 받은 본당에서 세례 증명서를 발급받아 두 번째 세례를 받은 본당으로 보내어 세례대장에서 삭제하도록 해야 하겠다.
이렇게 하여 두 번째 세례를 무효화한다면, 즉시 세례명에도 문제가 따를 것이다. 지금까지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갑자기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세례 때 이름을 붙여준 분들의 뜻을 생각하면 세례명도 유아세례 때 받은 이름으로 바꿀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아무래도 어색하다면 본당 신부님과 상의해서 바꿀 수도 있다. 어떤 세례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