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선한 포도밭 주인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16) 이른 새벽부터 서울 남구로역 주변은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룹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건설 일용노동자들이 모이는 인력시장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몰려듭니다. 이른 아침 구직시간이 지나면 희비가 엇갈립니다. 선택을 받아서 승합차를 타고 어디론가 일터로 떠난 사람과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3천불 시대라고 하지만 빈부 격차는 더 심해져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오늘날 이런 인력시장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회의 일용노동자들은 하루하루 일거리를 얻어 그날의 끼니를 이어가야 하는 사회적으로 보면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잠잘 곳과 음식을 제대로 보장받았던 노예나 종보다 못한 처지의 불안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당시 일용직 노동자였습니다. 그들이 일출부터 일몰까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받는 일당은 통상적으로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한 가족이 하루를 먹고 사는것도 빠듯한데 그나마 일거리를 찾지 못하는 날이 많아 일용노동자들의 생활은 늘 궁핍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시장터로 나가 누군가 밭주인의 눈에 띄어 하루 일꾼으로 불려가기를 바라며 서성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보듯, 오전 시간에는 물론이고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까지도 다만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일거리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 밭 임자는 이렇게 일거리를 얻지 못해 시장터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눈에 띄는 대로 자신의 포도밭 일꾼으로 불러들입니다. 심지어 오후 시간, 일몰이 다가오는 오후 다섯 시에도 사람들을 불러 포도밭에 가서 일하도록 배려합니다.
사실 이 비유는 포도밭에 일꾼으로 불림받은 일꾼들보다 그들을 부르고 돈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에게 초점이 있습니다. 그 주인은 가장 늦게 일터에 합류한 사람들부터 한 데나리온씩 주기 시작하는데 새벽부터 일한 사람도 나중 온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을 지급합니다. 하루 종일 장터에서 배회하다가 일이 끝날 즈음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당연히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들은 더 받아야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처음 약속했던 대로 주인은 하루 종일 일을 했든, 한 시간을 했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이 볼멘소리로 불평을 터트립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노동 시간과 품삯은 정비례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지요. 그런데 여기 포도밭 주인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그 주인에게는 얼마나 오랜 시간 노동을 했느냐 하는 노동의 양量도, 또 얼마나 짧은 시간에 어떤 일을 해냈느냐 하는 노동의 질質도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일찍이 선택을 받아 뙤약볕 아래서 열심히 일한 사람이나, 하루 종일 시장터를 빈둥거리며 배회하다가 늦게 합류한 사람이나 모두 동등한 조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카렐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가 쓴 「최후의 심판」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쿠글러라는 이름을 가진 연쇄 살인범이 나오는데 그는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다가 마침내 경찰의 총에 맞아 죽게 되어 하늘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특별법정에 재판관은 지상에서 재판관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재판을 하고 범죄자의 거짓을 밝혀줄 증인으로 전지전능하신 신神을 그 자리에 초대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신은 법정에서 쿠글러가 범한 모든 범죄사실을 소상히 밝히고 설명해줍니다. 마침내 재판관은 그 살인자에게 종신 지옥형을 선고합니다. 그러자 범죄자 쿠글러가 신에게 항의하듯 묻습니다.
“왜 신이신 당신이 심판을 하지 않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나를 심판하는 것입니까?” 신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재판관이 모든 것을 안다면… 그야말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안다면 말일세, 그는 재판을 할 수가 없네. 모든 사정을 이해하면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다네. 그러니 어떻게 재판을 할 수 있겠나? 자네를 재판하려면 오직 자네 범죄에 대해서만 알아야 하네. 하지만 나는 자네의 모든 걸 알고 있지. 말 그대로 모든 걸 말일세, 쿠글러, 그래서 내가 자네를 재판할 수 없다는 거야.”
이 짧은 소설이 하느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실 수밖에 없는지, 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놓을 수 없는지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설령 인간은 인간을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하실 수 없으십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가 어머니 배 속에서 지음 받을 때부터 그의 성장과정과 환경, 성격, 심지어 유전자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시기에 그를 심판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을 보십니다. 우리가 숱하게 주님을 배신하고 죄에 빠져들어도 일흔일곱 번이라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성장과정, 환경, 약함, 한계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결국은 인간 실존에 대한 연민 때문에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했지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보듯, 우리는 하루 종일 시장터를 배회하는 이들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바라보지만 주님은 오히려 하루 종일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을 보십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정당성을 내세워 노동의 대가를 따지지만 주님은 그들 삶의 처지를 헤아리시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일용할 양식’을 쥐어주시며 살아갈 권리를 주십니다. 우리는 수없이 사람들을 심판하고 손가락질하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원천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십니다.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인이라고 심판하더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그에게서 희망의 빛을 놓치지 않습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이런 하느님의 공평하신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비록 인력시장처럼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아우성치며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일용할 은총의 양식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10월호, 전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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