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아빠의 무력함 욥기에서 젊은 현자 엘리후는 “연만하다고 지혜로운 게 아니요 연로하다고 올바른 것을 깨닫는 게 아니라”(욥 32,9)고 주장합니다. 엘리후의 말대로 나이가 자동적으로 지혜를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이듦과 함께 차곡차곡 쌓이는 다양한 삶의 경험들로 인하여 삶에 대한 좀 더 깊은 통찰이 생겨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부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에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아주 이른 나이에도 이런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 바꿀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체험입니다.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을 피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만큼 두렵고 떨리는 일이 또 있을까요? 이번 달 구약성경의 인물과 함께 떠나는 치유여정에서는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직면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구약성경의 인물들에게 배워보고자 합니다. 사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들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자녀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 실패한 아버지들을 만나볼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훌륭했지만 자식들에게 과업을 물려줄 수도, 이스라엘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로서 맛본 무력함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몸부림치며 살았을까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지 못하는 자녀들을 원망하며 절연을 하였을까요? 이 아빠들은 그럼에도 삶에 감사하며 평화롭게 주님 곁으로 갈 수 있었을까요? 자녀 교육과 관련하여 어쩔 수 없는 무력함을 절절하게 체험하였던 몇몇 아버지들을 성경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 일컬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제르는 탈출기의 숱한 일화들 가운데 어떤 두드러진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탈출기 2장 22절, 18장 2-4절에서 그들은 이름만 간단히 언급될 뿐입니다. 만약 모세가 자신의 과업을 아들들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아버지였다면 그는 실패한 셈입니다.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과업은 그의 자식들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물려받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맡겨진 일이라 하더라도 그의 두 아들들이 이 정도로 성경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과연 모세는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겼을까요?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불행으로 여기기보다는 현실의 한 부분으로 담담히 받아들였을까요? 아론은 그의 맏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의 불행한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레위 10,1-3 참조). 레위기는 만남의 천막이 세워지고 난 후 그 천막 앞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리한 성막에 현존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모신 백성답게 거룩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레위기 1-9장은 성막에서 바쳐질 제사와 제사를 바칠 사제의 임직식에 대한 설명에 이어 아론이 첫 번째 제물을 바친 것에 대해 전해줍니다. 사제는 주님께 성별된 이로서 그분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이기에 그분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선포되었습니다(레위 8,35 참조). 하지만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이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들은 속된 불을 향로에 담아 주님 앞에서 향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주님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아론은 훌륭한 사제였지만 그의 두 아들이 사제의 규정을 위반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들들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론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실격자로 여기고 사제직을 내려놓으려 했을까요? 성경 어디에도 아론이 사제직을 내려놓으려 했다는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그렇게 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아론은 아빠로서의 무력함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엘리 사제도 이런 점에서는 무력한 아빠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이었고, 어린 사무엘이 훌륭한 예언자요 사제, 판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준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하였습니다(1사무 2장 참조). 그의 두 아들은 사제의 규정을 무시하고 함부로 제사 음식에 손을 대는 악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만남의 천막 어귀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소문까지 번졌습니다. 엘리는 두 아들을 꾸짖고 주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엘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의 말을 듣게 됩니다. 아들들의 악행 때문에 그의 집안은 멸망할 것이며, 다른 사람이 그의 집안을 대신하여 주님의 성소를 지키며 사제직을 이어받게 될 거라는 경고였습니다. 결국 엘리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주님의 궤를 메었던 두 아들을 잃었고, 그 소식을 듣고 놀란 나머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40년간의 그의 판관직은 이런 불행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로 자식들에 대해서만은 무력한 아버지였습니다. 누구보다 훌륭한 예언자요 사제였던 사무엘도 두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에르 세바에서 판관으로 일하였지만 그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내리곤 하였습니다(1사무 8장 참조). 이런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임금을 세워달라고 청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미 나이가 많았는데,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지 않으니 다른 지도자가 필요하고, 지도자를 세운다면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을 세워달라고 백성들은 청하였습니다(1사무 8,5 참조).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여 참으로 가슴이 아팠던 또 한 분의 아버지는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입니다. 마노아는 필리스티아 여자와 결혼하려는 삼손을 막지 못하였습니다(판관 14,3 참조). 아들이 나지르인 서원을 함부로 어기는 것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더 많은 예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녀들을 율법에 따라 교육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릇된 길을 걸었습니다. 아버지들은 무력하였습니다. 자식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 수도 없었고,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가게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설득하고 애를 써보아도, 강제와 협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찌해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우리 앞에 도도하게 흐르는 이 무력함의 강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이 강 앞에서 취하는 자세는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강 앞에 주저앉아 실의에 가득 찬 채로 희망 없이 사는 것을 선택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강 앞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등에 업히는 법을 배웁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이 도도한 물살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이들은 자신이 질 수도 없으면서 지려고 했던 짐을 내려놓습니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이 무력함의 강을 건너는 그의 마음은 감사와 자유로 넘쳐흐릅니다. 슬픔과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던 무력함이 더 큰 자유와 감사를 발견하는 기쁨의 강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합니다. 모세와 아론, 엘리와 사무엘, 마노아와 다른 수많은 아버지들은 하느님의 등에 업혀 무력함의 강을 건넜고, 그 무력함의 강이 사실은 은총의 강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패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그들의 자녀들을 진짜 아버지의 손에 겸손히 맡겨 드렸습니다. 인생에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 김영선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마음을 치유하는 25가지 지혜』 『기도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기도하기』 등이 있다. [생활성서, 2019년 10월호, 김영선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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