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솔로몬 이야기 (1) 열왕기의 시작은 다윗 임금의 말년에서 시작됩니다(1열왕 1-2장). 다윗 임금이 늙고 나이가 많이 들자, 아도니야는 자신이 임금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임금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도니야가 임금이 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임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나탄 예언자(2사무 7장; 12장)는 밧 세바와 함께 솔로몬을 임금으로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1열왕 1,11-27). 그 계획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성공하여 솔로몬은 임금이 됩니다(1,28-53).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것과 같이,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줍니다. 다윗 임금은 솔로몬을 임금으로 세우고 난 뒤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임금이 된 솔로몬.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솔로몬의 모습은 양면적입니다. 열왕기 상권을 읽어나가면, 솔로몬은 좋은 임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그의 마지막까지 유지하지 못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신명기계 역사서인 열왕기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지도 않았다.”(1열왕 11,33). 그는 분명 좋은 임금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을 걷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임금이 되고 꿈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냐는 말씀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3,9).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다고 한다면 무엇을 청할 수 있을까요? 좋은 집, 좋은 직장, 좋은 점수, 좋은 차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적인 것이 가장 먼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아들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방 민족의 침입에 맞설 수 있는 힘센 장수를,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부(富)가 아닌, 듣는 마음을 청하였습니다. 표현이 조금 독특하지요. 예전의 공동번역에서는 이 단어를 “지혜”로 번역하였습니다. 하지만 새번역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듣는 마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듣는 마음”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먼저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렙(לב)”은 기본적으로 심장이라는 신체기관을 의미합니다. 심장에서 의미가 확장되면서 마음이라는 의미도 지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한 심장은 오늘날 뇌(腦)와 같은 사고와 인식 기관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 앞에 수식어로 “듣는” 행위가 언급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들리는 것을 듣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말씀과 관련해서는 순명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참조: 신명 6,4). 그러므로 그가 청한 바는, 그가 임금이라는 높은 자리에서 들리는 것만 듣고 마음대로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듣고 이해하는 마음은 물론이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서 통치하고자 하는 은총이고 덕이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이 선택한 것은, 물질적 가치가 아닌, 고귀한 정신적 가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더 큰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인물이,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그가 통치 초기에 보여준 이러한 모습은 좋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우선은, 솔로몬의 좋은 모습에 머물고자 합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보다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갔던 솔로몬의 좋은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러기에 열왕기는 그가 지닌 지혜와, 명성과 수많은 부(富)의 이유를 솔로몬의 위대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가 얻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충실해서 얻은 은총이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러한 충실함과 성실함이 그를 위대한 임금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도 주님께 청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재화, 명예에 앞서서, 하느님의 뜻과 길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듣는 마음”을 우리도 솔로몬처럼 청해보면 어떨까요?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솔로몬 이야기 (2) 하느님께 “듣는 마음”을 청하면서, 그는 지혜의 길을 걸었으며 매우 부유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명성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지요. 그는 하느님의 집,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뚜렷한 자신의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왕기는 그에 대해서, “솔로몬 임금은 부와 지혜에서 세상의 어느 임금보다 뛰어났다.”(1열왕 10,23)고 호평을 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임금의 모습을 지녔던 솔로몬은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1열왕 11,4)는 혹평을 받습니다. 소위 승승장구하던 그의 여정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솔로몬 몰락의 시작에는 그가 외국인 아내를 맞아들였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우선 이집트 임금 파라오와 혼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는 파라오의 딸을 맞아들입니다(3,1). 이 혼인으로 모든 것이 틀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만 해도 솔로몬은 “주님을 사랑하여,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살았다.”(3,3)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문제는 파라오의 딸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히타이트의 여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는 왕족 출신 아내가 칠백 명, 후궁이 삼백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11,1-3). 이방 여인과의 혼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을 통해서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는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도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통치 초기에는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주님이 아닌 이방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의 사랑의 대상이 하느님이 아닌 이방 여인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내들은 그의 마음을 돌려놓게 됩니다(11,3 참조). 또 다른 문제는 솔로몬의 무리한 건축 사업이었습니다. 성전과 궁전의 건축이 한편으로는 그의 업적이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열왕기는 그가 성전과 궁전을 짓는 데 걸린 시간이 각각 7년과 13년이라고 보고합니다(6,38-7,1). 건축에 그가 쏟은 시간은 20년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통치한 기간이 40년인데, 그의 재임기간 절반이 건축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그 비용과 노동력은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바로 그 어려움은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됩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받은 지혜와 부를 통해서 온갖 영화를 누렸지만, 백성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계속되는 공사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울러 솔로몬은 남쪽 지파와 북쪽 지파를 차별하였습니다. 성전 건축 당시에 티로의 임금 히람에게 건축에 사용될 목재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비용으로 솔로몬은 많은 값을 지불하였고 동시에 갈릴래아의 성읍 스무 개를 히람에게 줍니다(9,11). 갈릴래아의 성읍은 남쪽 지파의 지역이 아니라, 북쪽 지파의 지역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땅을 잃은 북쪽 지파는 그냥 웃고 있었을까요? 그렇게 솔로몬의 처우는 북쪽 지파 사람들의 불만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이것은 그가 죽은 이후에 왕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정리해보면, 솔로몬 몰락의 첫 자리에는 그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라, 이방 여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방 여인을 사랑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인 아내들을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재물을 바칩니다(11,8). 이처럼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더 이상 지혜의 임금, 훌륭한 임금으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열왕기는 이 사실을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총평하기를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나의 길을 걷지 않고, 내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지도 않았다.”(11,33)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에게 모든 사랑을 쏟았기에 얻게 된, 지혜와 모든 부귀영화는 그가 하느님을 떠나면서 더 이상 그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을 거스른 그에게 내려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나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다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2019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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