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예수 그분… 벌써 10년이 지났다. 성경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온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대단한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왠지 모를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 마치 두 세상 사이에 방황하듯 헤매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낯설었다. 낯선 만큼 미래는 어둡고 불안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나 느낄 법한 후회도 가득했다. ‘좀 더 잘 살았더라면…’, ‘좀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두 손에 들린 논문 한 편, 그리고 학위증 하나. 이것이 내 나라, 내 교회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리곤 금세 내 나라, 내 교회의 새로움에 적응해 나갔다. 다른 나라, 다른 교회에서의 시간이 지난 내 삶에 있기는 했었나 싶을 정도로 빨리… 하나의 세상을 위해 다른 세상은 그렇게 잊혀져갔다. 사는 게 급급했거니와 사는 게 그렇다는 자조섞인 현실감에 의탁한 채…. 신약 성경을 다시 읽기 위해 굳이 지난 시간의 감정을 다시 끄집어 내는 건 예수, 그분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셨던 시간과 공간은 오늘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서 매우 낯설다.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는 신약 성경을 시작으로 수많은 증언(글과 말과 몸짓)으로 거듭나고 되새겨졌다. 마치 예수님의 시간과 오늘의 우리 시간을 이어 놓을 모양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두 세상을 이어 놓는 지난한 작업일지 모른다. 하나의 세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다른 세상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작업, 그리하여 왠지 모를 낯선 것에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며 때로는 반감으로 외면하며 제 세상을 다른 세상 위에 겹쳐 놓는 게 성경을 읽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낯선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역설이 신약 성경 읽기를 위해 전제되어야 한다.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힐수록 성경 읽기는 제대로 된 것이라 감히 단언해 본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꽤나 새롭고 어려운 생각들이 지금 우리의 삶을 관통해야 한다고 본다. 읽는다는 건, 객관적 지식의 일방적 수용의 문제가 아니다. 읽는다는 건, 그 행위를 통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성경 읽기도 매한가지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 그분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오늘 우리 안에 살아 숨쉬는 예수님을 그려나가는 일이 읽는다는 것이고, 그 예수님을 오늘 살려내는 일이 성경 읽기의 매력이다.(갈라2,20) 신약 성경은 스물일곱 개의 다른 이야기를 예수님, 그 분을 중심으로 엮어간다. 열세 개의 사도 바오로 서간들, 네 개의 복음서들, 공동체의 역사를 서술하는 사도행전, 공동체의 삶과 규범을 이야기하는 일곱 개의 가톨릭 서간과 히브리서, 그리고 묵시적 표현으로 예수님을 다시 그려보는 요한묵시록, 이렇게 스물일곱 개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살아낸 시간의 족적 위에 겹쳐놓고 되새긴 결과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시대가 다양하기 때문이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신념과 사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살아꿈틀거린다. 신약 성경 읽기는 우리 삶의 한가운데를 파고 들어와 우리를 흔들어 놓고, 우리를 넘어뜨리며,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요한3,2) 물론 그 지난한 여정 끝에 예수, 그분이 계신다는 신앙 공동체의 믿음은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약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부활을 선포하고 부활을 받아들이는 건 단순히 제 몸뚱아리의 세포를 재생산하여 영원히 숨을 내쉬는 데 집착하는 일이 아니다. 서기 50년경부터 시작된 신약 성경의 이야기는 부활한 예수님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자세에 집중한다. 부활은 제 삶의 자세를 다듬어보는 준거가 되었다. ‘깨어있음’으로 요약되는 신자들의 삶은 거룩해야 했다.(1테살 4,3) 세상이 어떻든, 그 환경이 어떻든, ‘깨어있음’은 세상의 유혹과 불의에 휩쓸리지 않는 신앙인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였다. 서기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불타 없어지면서 유다 사회는 율법을 중심으로 점점 엄격해지고 배타적인 사회가 되어 갔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엄격함에 짓눌리고 박해받았다. 복음서들은 유다 사회의 반감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굳건함과 충실함을 다그친다. 가톨릭 서간과 요한계 문헌들은 교회 공동체가 지켜내야 할 친교와 형제애를 무엇보다 강조한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신앙인은 세상을 거스르되, 세상을 사랑해야만 하는 역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잊지 않았다. 제 세상을 살기 위해, 지난 세상을 살아갔던 예수님을 결코 잊지 않았다.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체적 삶 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가셨다. 한 달 전, 교구 문화홍보국장 신부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강수원 신부님의 ‘구약 성경 다시 읽기’에 이어 ‘신약 성경 다시 읽기’를 써달라신다. ‘다시’라는 말에 잠시 머물러 본다. ‘다시 읽기’가 예수님을 헤아리는 이들의 노력, 예컨대 기존 신약 성경의 해설서와 주석서들을 다시 더듬고 요약하는 것이라면 몇 권의 책을 소개하면 그만이다. ‘다시’ 읽어 보는 건, 지금 나 자신의 ‘또 다른’ 노력을 요청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또 다른’ 노력은 나의 삶과 생각이 스며든 예수님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로 거듭나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1코린 15,1) 전해받은 복음을 다시 전해주는 건, 하나의 서류를 USB에 담아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단순한 배달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신념과 사상, 그리고 때로는 뜨겁고 때론 차가운 자신의 감정을 통해 복음을 새롭게 엮어나갔다. 테살로니카 교회, 코린토 교회, 갈라티아 교회, 필리피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의 끝, 로마에 이르기까지 바오로는 제 삶의 공간에 자신이 이해한 복음을 채워 나갔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되, 바오로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가 복음의 색깔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보잘 것 없는 글 솜씨와 내세우기는커녕 부끄럽기 짝이 없는 나의 삶 위에 ‘신약 성경 다시 읽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우리 교구 신자분들의 자비로운 마음 위에, 그 신자분들이 살아가는 세상 일들 위에 나 자신이 읽어내는 신약 성경의 예수님을 소개해보려 한다. 얼마 전 ‘구약 성경 다시 읽기’를 쓴 강수원 신부가 엷은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형, ‘구약 성경 다시 읽기’는 이야기하지마요. 먼저 쓰는 게 아닌데…” 잠시 머뭇거린 나는 약간의 짓궂음을 담아 이렇게 답했다. “아니. 네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예수님, 그분 중심으로 비판할 거야!” 앞으로 펼쳐질 ‘신약 성경 다시 읽기’를 접하기 전에 강수원 신부님의 ‘구약 성경 다시 읽기’를 ‘다시’ 읽어보시길 권한다. 감히 판단컨데 잘 쓰여진 글이고 잘 정리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다. 그 하느님께서 예수님으로 오신 이야기, ‘신약 성경 다시 읽기’는 ‘구약 성경 다시 읽기’의 두 번째 이야기다. 먼저 써주신 강수원 신부님께 감사하다. “강 신부, 고마워!” [월간빛, 2020년 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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