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사도행전 읽기 (4) 사도 바오로의 스승이며 유다 최고 의회 의원이던 가말리엘의 현명한 제안(5,35-39)으로 제자들은 매질만 당한 뒤 풀려납니다. 이후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복음선포에 더욱 전념합니다.(5,40-42) 숨어다니지 않고 공공연히 활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경외감이 듭니다. 그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게 되었고, 성령 강림으로 모든 것을 분명히 깨달아 용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요즘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숨어다니는 잘못된 신앙을 지닌 이들과 참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초대 교회의 첫 문제와 일곱 부제의 선출(6,1-7)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제자들을 보며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6,1) 그들 가운데는 예루살렘에 온 외국 출신 유다인들도 있었습니다.(2,5-13 참조) 루카는 그들을 그리스계 유다인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아람어 대신 그리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물론, 대부분은 사도들처럼 히브리계, 곧 아람어를 쓰던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그룹 간에 미묘한 문제가 발생한 듯합니다. 아마 예루살렘에 기반을 둔 히브리계 유다인들에 비해 아무 기반이 없었던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여러 면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게다가 이 두 그룹 간에는 신학적 견해에서도 차이가 있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히브리계 유다인이던 사도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2,46; 3,1; 5,12. 21)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스테파노의 경우는 성전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7,48-50) 이런 생각과 환경의 차이는 매일 배급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이란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는 순례자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행자와 극빈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거나, 그들을 장기적으로 돕기 위한 자금을 조직적으로 마련하곤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매일 배급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계 과부들이 유다계 과부들보다 홀대를 받은 것입니다. 일반적인 유다 사회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교회 안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처음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는 사도들이 하느님 말씀 선포에 온전히 봉사할 수 있도록 일곱 봉사자를 뽑자고 건의합니다. 온 공동체는 사도들의 건의에 동의하여 일곱 봉사자를 뽑아 사도들 앞에 세웠고, 사도들의 안수로 최초의 일곱 부제가 탄생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스테파노,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니콜라오스였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사도들의 영도 아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느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입니다. 스테파노의 체포와 죽음(6,8-8,1ㄱ) 일곱 부제 가운데 하나인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스테파노와 같은 그리스말을 쓰는 이방계 출신 유다인들이 와서 스테파노에게 논쟁을 겁니다. 하지만 스테파노에게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게 되자,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 스테파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는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을 부추겨 스테파노를 붙잡아 최고 의회로 끌고 갑니다. 그렇다면 스테파노가 과연 무슨 말을 했기에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말을 들었을까요? 그 내용은 이어지는 사람들의 거짓 증언과 최고 의회 산헤드린에서 행한 스테파노의 설교에서 잘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가 나자렛 사람 예수가 성전을 허물고 또 모세가 물려준 관습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발합니다. 실제 스테파노는 대사제 앞에서 구약의 역사 전체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스테파노의 설교는 구약 성경 전체, 특별히 창세기부터 열왕기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요약하는 명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통해 스테파노는 유다인들이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성령을 거역하였다고 고발합니다. 조상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했던 것과 같이 그들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조상들이 예언자를 박해한 것처럼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예수님마저 죽였다고 비난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오히려 하느님을 배신하였음을 고발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스테파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6,15) 이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스테파노의 비난을 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은 화가 나서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고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스테파노가 성령에 충만해져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 오른편에 서 있는 예수가 보인다고 말하자,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돌을 맞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용서하는 기도를 바치며 눈을 감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은 루카-사도행전 설화의 흐름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이 루카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와 스테파노의 죽음 이야기는 모두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사람의 아들에 대해 언급합니다.(루카 22,69; 사도 7,56) 그리고 예수님과 스테파노 모두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루카 23,34; 사도 7,60) 또한 둘 다 죽음을 맞으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깁니다.(루카 23,46; 사도 7,59)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활동이 스테파노에게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영을 받아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계속해 나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부활로 이어졌듯이 그들의 죽음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 현장에 머물면서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입니다.(7,58) 게다가 그 청년은 스테파노 죽음에 찬동까지 하고 있었습니다.(8,1) 하지만 바로 그 청년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스테파노가 맡았던 그 임무를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이어지는 단락들은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이 어떻게 회심을 하게 되며, 또 어떤 방식으로 예수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오로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스테파노는 예루살렘 성 동쪽 문, 곧 오늘날 사자 문이라고 부르는 성문 앞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합니다. 이 성문을 우리는 스테파노 성문이라고도 부르고, 양의 문이라고도 부릅니다. 양의 문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로 바치던 짐승들이 드나들던 문입니다. 스테파노는 바로 이 양의 문 앞에서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2020년 3월 8일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4-5면, 염철호 요한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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