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에스테르, 그리고 유관순과 툰베리 유관순: 민족을 위한 헌신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는 3·1 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어 숨을 거둔 지하 옥사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이듬해 순국하였다. 1902년생이니 열사의 나이 불과 열여덟 살이었다. 얼마 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었던 지하 옥사를 둘러보면서 문득 예전에 해미 순교 성지에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 조선 시대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지 못하여 온갖 고문을 당하며 순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돌이켜 생각난 것이다. 순교자와 순국열사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었을까?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나,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물음이 떠올랐다. 에스테르기 에스테르기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두 가지 본문으로 전한다. 그리스어 본문이 더 긴데 1장, 3-5장, 8장과 10장에 히브리어본에 없는 구절이 보태졌기 때문이다. 이 첨가 본문은 팔레스티나를 떠나 그리스 문화권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이 작품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에스테르기의 배경은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임금(기원전 465년 사망)의 수사 왕성이다. 저작 시기는 기원전 2세기경으로 이 시대 디아스포라 유다인 공동체가 겪은 고난을 반영한다. 페르시아 임금의 재상인 하만이 간악한 술수로 유다인을 몰살시키려 하자, 주인공 에스테르와 그의 보호자 모르도카이가 나서 유다 민족을 구하고자 활약한다. 성경은 ‘푸르’ 곧 주사위를 던져 유다인들을 멸망시킬 날짜를 정하라는 임금의 칙령이 에스테르의 중재로 철회되는 과정을 들려준다. 에스테르: 민족을 위한 헌신 모르도카이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아 온 이들 가운데 하나로(2,6), 고아가 된 삼촌의 딸 에스테르를 친딸처럼 키웠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신하들 앞에서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첫 번째 왕비인 와스티를 폐위하고 유다 여인 에스테르를 두 번째 왕비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모르도카이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재상 하만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 않는 바람에 그가 유다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모르도카이가 그렇게 행동한 까닭은 인간의 영광을 하느님의 영광 위에 두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4,17[7] 참조). 분노한 하만은 왕국 전역의 유다인들을 몰살하려고 임금에게 은 일만 탈렌트를 약속하고 허락을 받아 냈다. 그리하여 아다르 달 열사흗날에 모든 유다인들을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칙령이 반포된다(3,13). 한편 에스테르는 위험에 빠진 민족을 구하라는 모르도카이의 말에 허락 없이 임금 앞에 나아갔다가 목숨을 잃게 될까 봐 주저한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 앞에서 용기를 내 수사에 사는 모든 유다인들과 함께 단식한 뒤 임금 앞에 서기로 한다. 그는 주님께 기도드린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 주님,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모든 조상들 가운데에서 저희 선조들을 영원한 재산으로 받아들이시고 약속하신 바를 채워 주셨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저희를 원수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저희가 그들의 신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 주 아브라함의 하느님! 만물 위에 권능을 떨치시는 하느님 절망에 빠진 이들의 소리를 귀여겨들으시어 악인들의 손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또한 이 두려움에서 저를 구하소서”(4,17[14-30]). 마침내 목숨을 걸고 임금 앞에 나아간 에스테르의 용기와 결정적인 중재로, 유다인들을 절멸시키려던 날이 유다인들의 잔칫날이 되었다. 그날은 ‘푸림절’로서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이 그 전통을 이어받아 경축한다. 이 아름다운 유다 여인에게 바친 노래가 모르도카이의 입을 빌려 에스테르기에 보존되어 있다. “강이 된 그 조그만 샘, 거기에는 빛과 해와 많은 물이 있었는데, 그 강은 임금님께서 결혼하여 왕비로 삼으신 에스테르이다. … 나의 민족, 그것은 이스라엘, 곧 하느님께 부르짖어 구원된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이 모든 악에서 건져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커다란 표징과 기적들을 일으키셨다”(10,3[3-6]). 그레타 툰베리: 세상을 위한 헌신 그레타 툰베리는 2018년, 청소년으로서는 처음으로 스웨덴 의회 밖에서 기후 관련 행동을 한 것을 시작으로 2019년 전 세계적인 기후 관련 동맹 휴학 운동을 이끈 스웨덴의 10대 환경 운동가다. 201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고,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툰베리는 기후 변화로 위기에 놓인 세상을 지적하며 시급한 대응을 촉구한다. “우리는 대규모 멸종이 시작되는 시점에 와 있고, 사람들은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태계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여든 살이 넘은 미국의 영화배우 제인 폰다는 금요일 밤마다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다음 날 풀려나기를 반복한다. 불법으로 규정된 ‘기후 변화 대응 촉구’ 시위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제인 폰다는 툰베리의 외침에 감명을 받았으며 앞으로도 기후 변화 대응 촉구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지구를 돌아보며 우리 삶을 반성하고 그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니, 툰베리는 기후 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에스테르와 유관순, 그리고 툰베리 2000년 전 위험에 놓인 민족을 구하고자 용기를 내 권력자 앞에 선 에스테르, 100년 전 외세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고 식민지가 된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유관순, 그리고 바로 지금 세계 기후 변화 앞에서 위기에 놓인 세상과 인류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에 나선 툰베리, 이들 세 여성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하나는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으로, 이러한 공감 능력은 민족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한다. 또한 이들은 옳다고 믿는 신념에 헌신한다. 이 공감 능력과 신념이 이들에게 세상을 향해 외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리라! 여성보다 남성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큰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고자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작지만 큰 인물들이다. 에스테르의 기도를 들으시고 위험에 빠진 민족을 건져 주셨던 하느님께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순국열사들의 조국애와 희생을 보시고 대한민국의 독립에 손을 들어주셨던 하느님께서, 툰베리의 용기와 헌신에도 응답하시리라 믿는다. 아울러 그때 그들처럼,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소녀처럼 우리 자신도 에스테르, 유관순, 툰베리가 되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공동선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빌어 본다. * 강선남 헬레나 -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신약학 전공)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성경의 인물들」, 「교부들의 성경 주해, 탈출기-신명기」 등의 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20년 3월호, 강선남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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