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 여기 오시는 분은 다 이 나라의 기한이 없는 영구 멀티 비자를 받으신
분임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곳에서 다 만날 우리입니다. 그 첫 대면에 어떻게
인사하시겠습니까? 그 때는 이곳 사정들을 다 잊을 수 있는 그곳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이곳의 아쉬움들은 이곳에서 다 틀고 가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그곳인 하느님 나라의 정의는 이미 다 아는 우리입니다. 그곳 주소는
물론 우편 번호도 압니다. 세대주는 물론이고요. 다만 그곳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이렇게 다들 조금은 다르군요. 사실 지금도 제가 만나는 어르신 분들이 저를 지칭할 때
넌 어디에 사는 누구누구 아들이지? 그 누구누구와 ‘어디어디’가 만나시는 분마다
다들 다릅디다. 다들 경험하셨을 겁니다. 지금껏 이곳에서 우리가 보셨듯이 요.
지금 그분의 나라인 그곳의 명칭을 두고 많은 갑론을박을 하였습니다. 저의 ‘갑론’에 대해서 ‘을박’하신 분들께 굳이 저의 갑론을 다시 거론할 생각은 없습니다. 각자가
누구누구의 생각이 어떻다는 건 다 나름으로 아실 테니까요. ‘갑론을박’은 이렇게 함께
해야 어울리는 四字成語이기에 말입니다. 사람 사는 동네가 이곳에도 저곳에도 다
갑론을박일 겁니다. 그래야만 사람 사는 기분이 날 거니까요. 그리고 이삼용 님이 내어
주신 이성우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다들 각자의 이해의 폭을 가지셨을 테니까요.
역시 평신도와 사제의 간격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저는 느꼈습니다.
이게 믿는 우리가 순종하는 교도권에 대한 인정일겁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가져야 할 초심(初心)이니까요.
저는 지금껏 나눈 유익하고도 값진 대 토론에 저 나름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3년 전의 그 토론의 분위기도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3년 후 아니 몇 달 후 또 비슷한 토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토론의 자리를 나올 때는 웃는 얼굴로 악수는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의 멋진 만남의 기쁨을 함께 할 우리 아닙니까? 이곳에서의 기쁨이
없다면 그곳에서는 더 없을 겁니다. 그 나라의 영구 비자를 가진 우리는 각자가 그곳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던 간에 그곳의 세대주이신 그분의 초청을 이미 받은 상태임을
명심합시다. 유종의 미,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어야만 그분 보시기에 참 좋은
우리네 모습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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