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5) 로마에서 선교하다(사도 28,17-30)
사슬에 묶인 수인의 몸으로 담대하게 복음 전하다
- 바오로는 로마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한다. 사진은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로마 성문 밖 성 바오로 대성전 정면과 정원에 있는 바오로 사도상. 로마 남쪽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까지 마중 나온 형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도착한 바오로는 2년 동안 로마에서 지내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오로의 로마 선교에 대해 살펴봅니다. 유다인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다 수인의 몸으로 로마에 도착한 바오로는 감옥에 갇히지 않고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데(28,16) 이는 일종의 가택 연금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읍니다(28,17ㄱ). 유다인 지도자들을 불러 모은 것은 연금 상태여서 처신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유다인 지도자들이 모이자 말을 시작합니다. 바오로의 말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이곳 로마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은 ①자신은 유다인으로서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에게 넘겨졌다. ②로마인들은 자신을 신문한 후 사형에 처할 만한 근거가 없어서 풀어주려고 했지만 유다인들이 반대했다. ③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었지만 할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게 됐다는 것입니다.(28,17ㄴ-19) 그런데 바오로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28,20ㄴ) 이 말은 바오로가 로마까지 오게 된 사정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가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오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선포해 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로마의 유다인 지도자들에게도 선포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바오로가 수인의 몸이 아니었다면, 로마에 와서 먼저 유다인 회당을 찾았을 것입니다. 이는 바오로가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하면서 오늘날 터키 땅인 소아시아(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는 물론 마케도니아(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와 코린토에서도 먼저 유다인 회당을 찾았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죄수의 몸이어서 처신이 자유롭지 못했기에 로마에 사는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바오로의 말에 유다인 지도자들은 바오로에 관해 유다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같은 동족에게서 나쁜 보고를 들은 것도 없다면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그렇지만 나자렛 예수를 따르는 분파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나 반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서 바오로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28,22)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오로의 일차 목적이 일단 이루어진 셈입니다. - 로마 바오로 대성전 안 바오로 사도 무덤과 사도로 사도가 묶였다는 쇠사슬. 두 해 동안 하느님 나라 증언하다 유다인들은 바오로와 정한 날이 되자 많은 사람을 데리고 바오로의 숙소로 찾아옵니다. 바오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을 들어 예수님에 관해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러자 바오로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집니다.(28,23-24) 이렇게 그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 한 채 떠나려고 할 때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바오로는 먼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28,26-27) 그가 인용한 말씀은 “너는 저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이사야서 6장 9-10절로, 이스라엘 백성이 성령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이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28,28) 바오로의 이 마지막 말은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의 반박을 받았을 때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돌아섭니다.”(13,46)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입니다.(28,30) 수인의 처지여서 자유로이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선포할 수는 없지만 대신에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바오로를 찾아와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라는 바오로의 마지막 말(28,28)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오로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31)라는 문장으로 사도행전을 마무리합니다.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1,8) 이제 당시 세상의 중심이자 또한 땅끝을 의미하는 로마에서 사슬에 묶인(28,20) 수인의 몸인 바오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바오로는 3차 선교 여행 중에 에페소에서 2년 이상 머무르고 있었을 때에 로마에 가고 싶다는 의향을 이미 밝혔습니다.(19,21) 그리고 코린토에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까지 밝힙니다.(로마 1,13-15) 1. 마침내 바오로는 로마에 왔습니다. 죄수의 몸으로서 재판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죄수 신분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에페소 원로들에게 한 작별인사에서 볼 수 있듯이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다”(20,24)는 것이 바오로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오로는 로마에 온 지 불과 사흘 후에 로마의 유다인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 “이스라엘의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복음 선포에 열의를 쏟아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이라는 말은 바오로의 복음 선포 방식 가늠하게 해줍니다.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이스라엘의 희망”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이 표현으로 바오로는 유다인 지도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오로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할 때에 조상들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이나(13,17-25), 아테네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종교심을 치켜세우면서 ‘알지 못하는 신’을 들어 복음을 선포한 것(17,22-31)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 복음을 선포하려는 대상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접근하기. 바오로의 로마 선교는 이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줍니다. ※ 사도행전 본문을 따라가며 살펴보는 일은 이번 호로 마칩니다. 본문을 통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들을 정리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오로의 활동에 비춰 바오로 사도의 생애와 바오로 서간들을 몇 회에 걸쳐 조명하는 것으로 ‘사도행전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24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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